▲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SBS
추락한 비행기는 군용기인 C-123으로 1960~1970년대부터 미국에서 주로 활용되었던 전술수송기였다. 해당 기체는 한라산 일대를 비행하다가 능선 어디인가를 들이받고 골짜기로 추락하면서 여러 차례 폭발한 것으로 추정됐다.
비행기 사고의 특성상 시신들의 상태는 너무나도 참혹했다. 양씨는 "온전한 시신이 거의 없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상황에 너무 막막하더라"고 그날의 참상을 떠올리며 씁쓸해했다. 사망자는 무려 53명, 생존자는 전무했고 희생자 전원은 모두 군인이었다. 수색대원들도 어제까지 동고동락하던 전우들의 비극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현장 지휘관인 최 소령은 무거운 분위기의 대원들을 독려하며 시신을 수습할 것을 지시했고, 유일한 민간인 목격자인 양씨를 따로 불러 "오늘 목격한 일은 무덤까지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휴대폰도 SNS도 없었기에 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외부로 알려지지 않는 일들도 많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었다. 당시 <제주신문> 사진부장으로 근무하던 언론인 서재철씨는 텔레타이프(수신신호가 인쇄문자로 기록되는 자동기기, 당시 연합통신 등에서 속보를 알리는 데 사용)를 통하여 '군용기 추락'이라는 짧은 속보를 접했다. 또한 이튿날 제주공항으로 취재를 나갔다가 고위급 인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은밀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한라산'이 언급된 것을 엿들었다.
당시는 군당국조차 추락지점을 확실하게 파악 못 하던 시점이었지만, 서 기자는 언론인의 직감으로 정보들을 취합하여 군용기가 제주 한라산에 추락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취재에 나섰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82년 당시는 언론도 통제가 일상이었다. 회사는 위험한 취재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했지만 서 기자는 기자 정신으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 기자는 단독으로 산에 올라 추락한 군용기를 발견했고, 일대를 통제하던 군인들을 따돌리고 현장을 촬영하는 데도 성공했다.
하지만 회사로 돌아온 서 기자는 당시 언론사마다 배치되어 있던 정권 측 주재원들에게 발각되어 결국 촬영 필름을 압수당했다. 서 기자는 위기의 순간에 그나마 기지를 발휘하여 필름 한 통을 몰려 빼돌려놓았다. 서 기자는 "만약에 그래도 무언가를 남겨둬야 할 것 아닌가. 언젠가는 쓰겠지 생각은 했지만, 언제 쓰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고 회상하며 미래를 기약했다.
물론 당시에도 이 사고가 내내 비밀에 부쳐진 것만은 아니었다. 얼마 뒤 신문과 TV 등 주요 언론에서 이 사건을 크게 보도하면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이상기류로 군용기 추락으로 전원 순직'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는 국방부의 발표 전문을 그대로 옮긴 내용에 불과했고 취재 내용이나 촬영된 사진은 전무했다. 정작 정부와 군당국은 희생자의 유족들에게는 언론에 보도될 때까지도 순직 사실조차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사망한 대원들의 정체는, 바로 대테러부대인 특전사 707특임대대 47명, 그리고 공군 대원 6명이었다. 유족들은 특수훈련도 견뎌낸 베테랑 정예요원들이 사고로 허무하게 몰살 당했다는 사실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더구나 사고 당시가 훈련중이라고 했음에도 정작 군용기 내에서 필수적인 낙하산 장비도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유족들은 특전사령부를 찾아가 "무슨 훈련을 어떻게 받았길래 대원들이 다 사망했나?"라며 추궁했지만 군은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 하고 기다리라는 이야기만 반복됐다.
군의 무성의한 대응에 분노한 유족들은 급기야 돌발적으로 사령부 상황실의 유리를 깨고 안으로 쳐들어가 관련 서류를 수색하다가 한 장의 메모를 발견한다. 특전사령관이 707대대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훈련명칭을 '동계특별훈련'으로 변경하고 장병들에게도 고지하라고 지시하는 수상한 내용이었다. 왜 그들은 굳이 훈련명을 바꿔가면서까지 내용을 숨기려고 했던 것일까. 과연 순직한 대원들의 진짜 임무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