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월담

청춘월담 ⓒ tvN


tvN 사극 <청춘월담>에서는 국무가 도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살인범으로 체포되는 경악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송씨 성을 가진 이 무녀는 몽롱한 상태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뒤, 갓난아기(生), 연로한 사람(老), 병든 사람(病), 이미 죽은 사람(死)를 해쳐 생로병사에 대한 연쇄살해를 이루려다가 붙들렸다.
 
임금(이종혁 분)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도 그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지난달 28일 방영한 8회는 임금 앞에서 자신의 범행 동기가 송가멸이(宋家滅李)였음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시각, 대궐 안에서는 한자 이(李)로 표현되는 오얏나무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활활 타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송씨가 이씨를 멸하리라는 그의 예언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임금과 조정 대신들을 그렇게 경악시킨 국무는, 분노한 왕이 칼을 내리치기 전에 갑자기 생명이 끊어져 또 한번 충격을 줬다. 몸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뱀에 물려 그는 목숨을 잃었다.
 
무속인들이 이처럼 주목을 받는 장면은 조선을 건국한 유교 사대부들이 말끔히 지우고 싶어했던 장면이다. 그들은 불교는 물론이고 무교(巫敎)의 흔적까지 지워서 유교 철학자들의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라지만, 이는 부분적으로 그럴 뿐이었다. 왕조시대에는 왕실이 나라의 표준이므로 왕실의 종교가 곧 국교였다. 하지만 조선왕조에서는, 신하들은 유교를 믿지만 왕실은 불교와 무교를 믿는 양상이 전개됐다. 왕족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신앙은 불교나 무교를 택했다. 그래서 유교가 조선의 국교라는 명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조선왕조가 무속을 배척하지 못한 데는 현실적 사정도 작용했다. 유교인이나 불교인 못지않게 무속인들도 국가 경영에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왕조시대 국가들도 대중의 건강과 보건에 신경을 썼다. 농업생산성을 유지하고 조세를 안정적으로 거두려면 농민들이 건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학을 글로 배운 의료 인력을 대거 배출할 만한 국가적 역량이 왕조시대에는 미약했다. 유의(儒醫)로 불린 유학자 출신의 의원들도 있었지만, 이들이 의료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 왕조들처럼 조선왕조 역시 초자연적 의술을 가진 무속인들에게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무의(巫醫)의 협력이 없으면 역병 팬데믹은 물론이고 일상적인 보건 수요에도 부응하기 힘들었다.
 
그런 실정을 반영하는 것이 <경국대전>이다. 이 법전의 호전(戶典) 편은 "서울의 무녀는 활인서에 소속시킨다"라고 규정한다. 한성부 무녀들을 국립 의료원에 소속시켰던 것이다.
 
무녀들에게 의료를 맡기는 장면은 세종시대 왕명에서도 확인된다. 음력으로 세종 11년 4월 18일자(양력 1429년 5월 20일자) <세종실록>은 '지방 주민들을 인근 무당에게 맡기고, 환자가 발생하면 무당과 일반 의원이 치료하게 하자'는 예조의 건의가 재가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무녀들이 의료 서비스를 담당하던 기존 현실을 반영해 세종시대에는 이런 식의 제도적 정비가 이뤄졌다.
 
위 날짜 실록에는 보건정책에 협조하는 무속인에 대한 인센티브가 소개돼 있다. "연말에 가서, 사람을 많이 살린 이는 무세(巫稅)를 감면해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치료 실적에 따라 무속인 세금을 감면해주는 정책을 운영했던 것이다. 책으로 의술을 배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으로 묘사된 명의 유이태(유의태)는 실제로는 허준과 무관했다. <동의보감> 저자인 허준은 1615년에 사망했고, 유이태는 1652년에 출생했다.
 
바로 그 유이태의 후손인 한의사학(韓醫史學) 박사 유철호가 윤영수 작가와 함께 쓴 <조선의 히포크라테스 유이태>는 "유이태는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갔답니다"라며 지금의 경남 산청군에 거주하는 유이태가 지금의 경북 구미시까지 왕진 간 일을 소개한다. 이 책은 유이태가 구미시 환자에게 발송한 서신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유이태를 비롯한 당시의 의원들이 먼 데까지 왕진을 간 것은 의원 본인이 유명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환자가 재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책으로 배운 의료인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근의 무녀한테 치료를 받기가 곤란한 환자들은 이런 식의 치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엇다. 이런 현실이 무녀에 대한 조선왕조의 의존을 낳게 된 요인 중 하나다.
 
돌비라는 무녀가 있었다. 연산군 및 중종 시대를 살면서 한때 국무로 불린 그의 존재는 무속을 탄압하면서도 무속한 제휴한 조선왕조의 실정을 보여준다.
 
무녀 돌비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사헌부는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다가 깜짝 놀랄 만한 물건을 발견했다. 음력으로 연산군 9년 4월 28일자(양력 1503년 5월 23일자)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돌비가 괴이한 술법을 부려 세상을 어지럽한다는 이유로 그를 체포하려고 출동한 사헌부 관헌들은 그의 집에서 부적 4장을 확보했다. 사전에 연락을 받았는지 돌비는 집에 없었다.
 
사헌부 관헌들이 놀란 것은 그 부적들이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에서 제작됐기 때문이다. 제작처가 내수사라는 사실은 그 집 사람의 진술로 확인됐다.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윗선'의 존재를 맞닥트리게 된 사헌부는 임금인 연산군을 찾아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산군은 "내수사에 물어보라"며 사헌부 관헌을 돌려보냈다.
 
돌비의 이름은 그 뒤로도 실록에 등장한다. 이듬해인 1504년에 지방 관노비로 쫓겨간 일,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왕이 된 지 9년 뒤인 1515년에 임금의 옷을 집으로 가져갔다가 벌을 받은 일 등등이 소개된다. 왕실에서 어의를 줬기 때문에 가져갔으리라고 이해하는 게 합리적이지만, 왕실이 시인할 리 없으니 그가 책임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왕실과의 밀착으로 번번이 주목을 받던 돌비와 같은 이름이 1522년에 전혀 다른 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음력으로 중종 17년 9월 25일자(양력 1522년 10월 14일자) <중종실록>은 경북 선산의 사찰 노비가 세 쌍둥이를 낳았다는 뉴스를 전하면서 돌비라는 산모의 이름을 언급했다.
 
무녀 돌비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동명이인이 주목을 끌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이 산모는 관노비가 아닌 사찰 노비였다. 1503년 당시의 무녀 돌비가 1522년에 세 쌍둥이를 낳았다면, 1503년 당시의 돌비는 나이가 꽤 어렸어야 한다.
 
하지만, 관노비가 사찰 노비로 전환되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승려들이 무속인을 겸하는 사례도 많았기 때문에 불교와 무속의 교류가 적지 않았다. 세상의 견제를 받던 돌비가 사찰을 안식처로 선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 세 쌍둥이 산모가 무녀 돌비가 아니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다둥이 엄마가 됐는지 아닌지는 확단할 수 없지만, 무녀 돌비의 존재는 무속과 조선왕조의 밀착을 보여주는 자료다. 내수사 돈으로 부적을 만들고 어의를 자기 집에 가져가는 행동은 유교 사대부 출신의 고위 대신들도 감히 생각하기 힘들었다. 임금을 대놓고 저주하는 <청춘월담> 속의 국무처럼은 아닐지라도, 무녀들은 의료 기술을 매개로 조선왕조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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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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