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다음 소희> 스틸 이미지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정주리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딜레마는 격렬한 사회적 논쟁 주제가 된 실제 사건 배경을 충실히 옮기면서도 어떻게 '영화적 방법'으로 구성하는가가 되었을 테다. 사회파 드라마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 감독들처럼 가능한 극중 인물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신인 연기자들을 대폭 기용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고서야 제작진과 연기자 모두 간접경험을 통해 소재와 배경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동시대를 살아가지만 보이지 않는 장막처럼 은폐된 실체적 진실을 구현하기 위해선 오로지 성실하고 꼼꼼히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해가며 한 치라도 더 다가가는 방법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나 보도 자료를 조금만 찾아보면 <다음 소희>에 참여한 이들이 허투루 타인의 사회적 죽음을 소재용으로만 소모하려는 태도는 아닐 것이라는 기본적인 신뢰를 가질 만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척이나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감독은 사건 관련 뉴스와 방송들, 현장실습생 문제를 다룬 책들을 이것저것 폭넓게 참고했다고 한다. 특히 인터뷰 등에서 언급되던 세 권의 책 제목은 기이할 만큼 핵심 소재가 된 실습생 자살 사건의 기본 전개, 즉 1부에서 소희가 처하게 된 일련의 상황과 딱 맞게 일치한다. 해당 사건을 최초로 보도하고 지속적 취재를 해냈던 허환주 <프레시안> 기자의 책 <열여덟, 일터로 나가다>에서 소희는 출발한다. 아직 부모의 뒷받침 아래 대학에 진학하고 취업준비과정까지 길게는 10년을 더 보살핌을 받게 되는 또래 청소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행로인 셈이다. 그리고 실제 현장실습생 출신 허태준 작가의 책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처럼 사각지대에서 청소년인권도 노동자 권리도 무엇 하나 보호받지 못하던 소희와 동료들의 상태가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르포작가 은유가 사건 희생자 유가족, 친구들과 진행한 인터뷰를 토대로 기록한 르포르타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이 결론처럼 꽂힌다.
그리고 2부에서 경찰 공권력을 활용한 유진의 수사를 통해 그러한 비극적 과정이 사회 일반의 방조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는 구조적 실체가 드러난다. 유진은 끈덕지게 소희의 죽음 이전 상황을 복기하며 자신이 가용한 조치를 통해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소희와 그의 동료 실습생들은 골치 아픈 일은 훨씬 적고 비용과 관리책임 면책을 위해 정부와 기업, 근본적으로는 남한 자본주의 체제가 암묵적으로 허용한 야만적인 정글에 방치된 상태였음이 밝혀진다. 학교는 취업률을 올리기 위해, 기업은 이윤을 내기 위해 이미 확립된 구조 내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중이다. 유진이 분노를 토해내지만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교육부와 노동부는 잠자코 관망할 뿐이다. 유진이 속한 조직인 경찰 역시 굳이 사건을 파헤칠 의도란 찾아보기 어렵다. 몇몇의 선의는 침묵의 카르텔 앞에서 금방 열기를 잃어버릴 위기에 놓인다.
영화에는 수많은 '빌런'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한나 아렌트가 목격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판박이다. 모두 자신들은 어쩔 도리가 없고 위에서 정해놓은 규칙, 혹은 구조에 따라 열심히 살 뿐이라 변명한다. 유진이 관객의 분노를 대신해 울분을 토해내며 들이박을 태도를 보이면 '현실'이 그런 것이라며 한숨을 쉬거나 심지어 세상물정 모른다는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대한다.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려는 콜센터 본사 직원들의 태도가 가증스럽긴 하지만 개별 대기업의 도덕적 해이는 <다음 소희>의 진면목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섬뜩했던 순간은 유진이 들이닥쳐 관리감독 책임이 있지 않느냐며 항의하는 교육청에서 그를 상대하러 출동한 담당 장학사다. 교육청이 학교 현장실습을 제대로 감독했다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을 거라는 유진에게 장학사는 피라미드처럼 수직계열로 들어선 경쟁과 이윤 지상주의가 우리 사회의 중심 기둥이라는 섬뜩한 진실을 설파한다. 당장 불이라도 지를 양 달려들던 유진은 어느 순간 말문을 잃고야 만다. 자신의 선의와 양심, 공권력의 작은 권한만으로 대적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괴물과 맞닥뜨렸다는 걸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결국 유진에게 남은 건 기억과 애도의 태도일 뿐이다.
상상적 복수보다 처연한 연민을 새기는 영화
▲영화 <다음 소희>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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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사회적 공분이란 기름 위에 성냥을 던지는 대신, 그 끈적끈적한 기름의 질감과 멀리서 이글거리는 불꽃 사이의 긴장을 간격을 두고 묘사하는 태도를 취한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폭동과 붕괴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경고보다는 유진을 통해 관객이 느끼는 처연한 슬픔과 연민의 정서를 호소하는 방향을 택한다. 유진은 관객의 안타까움을 대변하려는 듯 부도덕한 현실에 맞서 포효해보지만 그가 직접 겪게 된 너무나 강고해 뵈는 남한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질서 앞에서 (그 자신이 공권력의 일부이긴 하지만) 결코 뛰어넘을 순 없는 한계 앞에서 주저앉고야 말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선한 이들의 무력한 패배를 짐작케 하면서도 진실을 밝히려 분투하던 몇몇 사람들 사이에 가느다란 연민의 끈을 남기는 것으로 소임을 다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측면에서 <다음 소희>는 솔직한 영화다. 세상의 부도덕과 모순은 쉽게 박살낼 수 없다. 현실에서는 마블 히어로들이 출동하지 않는다. 만약 유진이 통쾌한 복수와 응징을 성공시키는 존재로 영화 속에서 우리에게 복수의 쾌감을 수여했다 해도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권선징악 카타르시스는 절반 넘게 휘발되고 말 게 분명하다. 대신에 영화를 만든 이들은 관객의 뇌리에 어떤 질문이 떠오르기를 바랄 테다. '다음 소희'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현실에서 소희의 죽음으로부터 6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장실습생 노동착취는 근본 개선과는 거리가 먼 상태라는 점을 영화적 쾌감으로 덮을 순 없는 노릇이란 걸 감독은 겸허히 인정하고 수용한다.
결국 2023년 현재도 한국 사회, 나아가 세계의 대부분은 교육청 장학사가 싸늘하게 답한 바 그대로 작동하는 중이다. 더 낮은 비용과 더 많은 이윤을 지상과제로 설정하고 청소년 노동은 물론 아동노동도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자행되는 중이다. 결국 우리 인류의 현 상태라는 게 마치 고대의 사원에서 인신공양 제물로 아이들을 바치고 노예들을 순장하던 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는 셈이다. 21세기에도 고스란히 그런 사회적 야만이 '어쩔 수 없는 현실' 운운하며 반복된다면 그런 세상이 지속되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물론 <다음 소희>는 위기의 징후를 파괴적으로 경고하려는 태도를 드러내진 않는다. 하지만 격렬한 고성보다 때로는 차가운 직시, 그리고 침묵의 폭로가 더 진하게 마음속에 쐐기를 박는 힘을 발휘하곤 한다. 1부의 마지막, 점점 멀어져 가는 소희의 뒷모습과 2부에서 그런 소희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듯 뒤쫓는 유진의 클로즈업 대비는 우리가 '다음 소희'를 대해야 할 양심과 연대로 고스란히 전이되어야 할 테다.
<작품정보> |
다음 소희 NEXT SOHEE
2022|한국|드라마
2023. 2. 8. 개봉|138분|15세 관람가
각본/감독 정주리
주연 배두나(유진 역), 김시은(소희 역)
출연 정회린(쭈니 역), 강현오(태준 역), 박우영(동호 역), 이인영(은아 역),
박희은(소희 모 역), 김용준(소희 부 역), 심희섭(세이브팀 전 팀장 역),
윤가이(지원 역), 정수하(정인 역), 박윤희(센터장 역), 최희진(세이브팀 새 팀장 역),
유정호(세이브팀 부장 역), 김우겸(배형사 역), 송요셉(형사과장 역),
허정도(담임 역), 박수영(교감 역), 권다함(주무관 역), 황정민(장학사 역),
한혜지(전 팀장 아내 역), 엄옥란(가맥집 주인 역)
제공 쏠레어파트너스(유)
제작/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
공동제작 크랭크업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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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