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2월 고 신해철이 이끄는 록밴드 넥스트는 조금 특별한 성격의 스페셜앨범 'Regame?'을 발표했다. 이 앨범은 넥스트의 초창기 노래들과 신해철 음악의 출발이었던 무한궤도 시절의 노래들, 그리고 신해철이 홀로 참여했던 영화음악 등을 재해석해 녹음한 '셀프 리메이크 앨범'이었다. 작년 7월에는 여성 솔로 아티스트 정인이 2011년에 발표했던 미니앨범 타이틀곡 <장마>를 10년 만에 '셀프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이처럼 뮤지션들의 경우엔 뮤지션 개인이나 멤버 구성원, 또는 소속사의 뜻에 따라 과거 자신이 발표했던 음악을 재해석해 다시 발표하는 '셀프 리메이크'를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에 비해 더욱 많은 인원과 비용이 필요한 영화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감독이나 배우가 과거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를 새로운 색깔로 재해석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해도 실제로 이를 다시 만들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리메이크작은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감독이나 배우, 제작사 등이 바뀐 채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스페인 국적의 이 배우는 1997년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의 캐릭터를 4년 후 할리우드 리메이크판에서도 자신이 직접 연기했다. 칸 영화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연기력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바닐라 스카이>의 페넬로페 크루즈가 그 주인공이다.
 
 <바닐라 스카이>는 1997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를 4년 만에 리메이크해 2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바닐라 스카이>는 1997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를 4년 만에 리메이크해 2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UIP코리아

 
칸-베니스-아카데미 트로피 모두 가진 배우

1974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크루즈는 어린 시절 스페인 국립 음악원에서 9년 동안 발레를 공부했다. 하지만 10대 초반 연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크루즈는 14살 때부터 혼자 에이전트를 찾아 다니며 오디션을 봤고 15살 때 연예기획사 오디션에 합격했다. 뮤직비디오를 통해 연예계에 데뷔한 크루즈는 1991년 영화 <하몽하몽>에서 주인공 실비아를 연기하며 10대의 어린 나이에 영화의 주연으로 데뷔했다.

고국인 스페인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크루즈는 1997년 <오픈 유어 아이즈>와 1999년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호평을 받았고 2001년 드디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크루즈의 할리우드 진출작은 바로 자신이 출연했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리메이크작 <바닐라 스카이>였다. 크루즈는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오픈 유어 아이즈>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 소피아 역을 맡아 톰 크루즈와 애틋한 멜로연기를 선보였다.

하지만 <바닐라 스카이> 촬영 도중 할리우드의 스타커플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11년의 결혼생활을 마무리했고 이어 톰 크루즈와 페넬로페 크루즈의 열애소식이 전해졌다. 페넬로페 크루즈는 배우로서의 연기보다는 슈퍼스타 톰 크루즈와의 연애소식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고 2004년 할리우드를 떠나 이탈리아 영화 <빨간 구두>에 출연했다. 그리고 크루즈는 <빨간 구두>를 통해 유럽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크루즈는 2006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을 통해 함께 출연한 5명의 배우와 함께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남편인 하비에르 바르뎀, 스칼렛 요한슨 등과 함께 우디 앨런 감독의 <내 남자의 아내여도 좋아해>에 출연해 미국과 영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따냈다. 2011년에는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에서 여성해적 안젤리카를 연기하기도 했다

크루즈는 2012년에도 제시 아이젠버그, 엘런 페이지(현 엘리엇 페이지), 로베르토 베니니 등과 <로마 위드 러브>에 출연했고 2016년엔 벤 스틸러가 연출과 주연을 맡은 코미디 영화 <쥬렌더 리턴즈>에서 발렌티나 역을 맡았다. 평소 여성과 흑인 인권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배우로도 유명한 크루즈는 작년 스페인과 프랑스의 합작영화 <페러렐 마더스>를 통해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7년작 스페인 영화를 4년 만에 리메이크
 
 원작의 소피아를 연기했던 페넬로페 크루즈(오른쪽)는 리메이크작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똑같이 소피아 역을 맡았다.

원작의 소피아를 연기했던 페넬로페 크루즈(오른쪽)는 리메이크작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똑같이 소피아 역을 맡았다. ⓒ UIP코리아

 
자고로 영화의 흥행은 오직 하늘만 알 수 있다지만 사실 <바닐라 스카이>는 개봉 전부터 흥행할 확률이 매우 높은 작품이었다. 검증된 원작이 있었고 최고의 슈퍼스타 톰 크루즈와 배우로서 전성기가 시작되던 페넬로페 크루즈, 카메론 디아즈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68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바닐라 스카이>는 세계적으로 2억300만 달러의 뛰어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바닐라 스카이>에 출연하기 전 오우삼 감독이 연출한 첩보액션영화 <미션 임파서블2>에 출연했던 톰 크루즈는 <바닐라 스카이>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하는 데이빗 에임스를 연기했다. 할리우드에서 손 꼽히는 미남배우인 톰 크루즈는 영화 속에서 교통사고로 인해 얼굴의 반 이상이 심하게 손상되는 쉽지 않은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톰 크루즈는 뛰어난 연기로 이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많은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바닐라 스카이>는 1997년에 개봉했던 스페인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이 개봉한지 단 4년 만에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 원작에 익숙하지 않았던 관객들은 스타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바닐라 스카이>에 열광했지만 국내외의 평단에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다만 비틀즈 출신의 전설적인 뮤지션 폴 메카트니가 만든 영화의 주제가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아카데미 주제가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오픈 유어 아이즈>가 충격적인 반전과 스릴러적인 부분을 부각시켰다면 <바닐라 스카이>는 멜로적인 부분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특히 영화 후반 주인공 데이빗이 옥상에서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 분)에게 "우리 좀 봐. 난 냉동인간이고 넌 죽었어. 그리고 널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장면은 상당히 애틋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데이빗은 "다시 널 찾을게"라고 속삭인 소피아의 말을 들은 후 건물 옥상에서 용기 있게 떨어지며 길었던 꿈에서 깨어난다.

1989년 <금지된 사랑>을 연출하며 데뷔한 카메론 크로우 감독은 1996년 톰 크루즈와 르네 젤위거 주연의 <제리 맥과이어>를 통해 일약 흥행감독으로 떠올랐다. 각본가로도 유명한 크로우 감독은 2000년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각본과 연출을 맡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2001년엔 <바닐라 스카이>라는 또 하나의 흥행작을 연출했다. 크로우 감독은 2015년 브래들리 쿠퍼와 엠마 스톤, 레이첼 맥아담스 주연의 <알로하>를 만들었다.

최고의 스타 카메론 디아즈가 조연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카메론 디아즈는 <바닐라 스카이>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에 가까운 '서브여주' 줄리아나를 연기했다.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카메론 디아즈는 <바닐라 스카이>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에 가까운 '서브여주' 줄리아나를 연기했다. ⓒ UIP 코리아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카메론 디아즈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과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애니 기븐 선데이>,<미녀 삼총사> 등을 연속으로 흥행시키며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여성배우였다. 그런 카메론 디아즈가 <바닐라 스카이>에서 좋게 봐도 서브 주인공에 불과한 줄리아나 줄리 지안니 역을 맡는다는 것은 할리우드에서 차지하고 있던 그녀의 입지를 생각하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카메론 디아즈는 여주인공 소피아 역을 할리우드에서 신인이나 마찬가지였던 페넬로페 크루즈에게 양보하고 기꺼이 줄리아나를 연기했다. 줄리아나는 유력 출판사와 잡지사를 운영하는 데이빗의 S파트너로 평소엔 쿨하게 행동하지만 데이빗 앞에 소피아라는 새로운 여성이 등장하자 갑자기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다. 결국 줄리아나는 데이빗을 차에 태우고 동반자살을 시도하며 목숨을 잃지만 데이빗의 환영에 나타나며 그를 괴롭힌다.

<탱고와 캐시>,<분노의 역류>,<파이널 디씨전> 등에서 주로 남자답고 터프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 커트 러셀은 <바닐라 스카이>에서 데이빗의 정신과 상담을 해주는 커티스 맥케이브 박사를 연기했다. 물론 맥케이브 박사는 실존인물이 아닌 데이빗의 자각몽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로 데이빗이 꿈이 아닌 현실을 선택하면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기 때문에 데이빗이 꿈에서 깨어나는 선택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바닐라 스카이>에는 한국관객들에게 상당히 반가운 배우도 출연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와 <옥자>, 마블 스튜디오의 <닥터 스트레인지>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틸다 스윈튼이다. 틸다 스윈튼은 <바닐라 스카이>에서 데이빗이 이용하는 생명연장회사의 대표 레베카 디어본을 연기했다. 레베카는 영화 속에서 분량은 길지 않았지만 데이빗과 관객들에게 영화의 반전을 설명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바닐라 스카이 카메론 크로우 감독 페넬로페 크루즈 톰 크루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