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1TV <태종 이방원>
KBS1
왕조국가에서는 군주의 혈통이 중시됐다. 천명을 받은 거룩한 존재로 인식돼야 건국시조로 추앙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건국시조의 혈통으로 인정돼야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이방원은 정권은 잡았지만 건국시조는 아니었다. 이방원은 이미 존재하는 나라를 가로챌 능력이 있음은 입증했어도, 없는 나라를 새로 세울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398년 집권(즉위는 1400년) 이후의 이방원한테는 자신과 혈통적으로 연결되는 건국시조가 필요했다. 이방원이 왕이 되려면 건국시조 이성계를 자신과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추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같은 현실적 필요 때문이기도 했다.
쿠데타를 당한 이성계는 광해군이나 연산군과 다를 바 없었다. 광해군과 연산군에게는 임금이 되기 전에 받은 군호(君號)가 있었다. 그런 대군 칭호가 있었기에 실각 뒤에 광해군·연산군으로 불릴 수 있었다. 이성계는 왕자를 거치지 않고 왕이 됐기 때문에 실각 뒤에 군호로 불릴 여지가 없었다. '패주 광해군'이나 '패주 연산군'처럼 불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패주 이성계'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왕좌를 빼앗겼으니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성계가 공식적으로 패주가 되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이방원이었다. 패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군주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군주 자리를 지키게 되면 정치 불안이 조성될 수밖에 없었다.
건국시조를 제외한 군주들은 시조의 혈통을 계승한 이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실제로는 임금 생활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을 죽은 뒤에 임금으로 격상시키는 추존왕 제도가 필요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세조(수양대군)의 아들인 의경세자는 만 1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조를 계승한 사람은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다. 예종 역시 19세에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예종의 조카인 성종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그 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된 것은, 성종을 군주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종의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의경세자를 왕으로 격상시켰던 것이다.
왕의 아들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면 그 아버지를 추존왕으로라도 만들어주는 것이 왕조시대 사람들의 관념이었다. 이런 관념이 존재하는 시대에, 이방원의 아버지가 패주가 되고 죄인이 되면 누구보다 이방원이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과 태상왕으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런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에 따라 이성계가 패주가 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 측면을 놓고 보면 이성계는 패주와 다를 바 없었다. 건국시조가 실질적 패주가 됐으니 이성계의 나라는 이방원의 집권을 계기로 사실상 단절됐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 뒤 조선은 실질적인 새 출발을 했다. 그러니 1398년 이후의 조선을 이성계의 나라로 볼 것인가 이방원의 나라로 볼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태종 묘호를 받은 이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