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픽사 애니메이션 23번째 <소울>이 코로나19 시대에도 극장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개봉 4주차에 150만 명을 넘어섰고 관람객들의 반응도 뜨거워 네이버에서는 평점 9.37을 기록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제78회 골든 글로브 장편 애니메이션상과 음악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비평가들의 평론을 토대로 하는 로튼 토마토 지수 신선도도 96%이다.
 
개인적으로는 피트 닥터(53) 감독의 이전 작품 몬스터 주식회사(2001), 업(2009), 인사이드 아웃(2015)이 모두 좋았기에 소울 역시 오래 전부터 기대를 하고 있었다. 작품이 거듭될수록 아이디어도 기발해지고 사람에 대해 보다 입체적이고 따뜻한 시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재즈'만이 자신의 인생 전부라고 생각하는 '조 가드너'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뉴욕에서 중학교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던 조는 꿈에 그리던 최고의 재즈 클럽에서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게된다. 지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조가 지구에 내려가기 싫어 하는 영혼 '22'와 하루 동안 여러 경험을 하며 서로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일종의 버디 무비이다. 

뉴욕 도시의 사실적인 풍경, 이제는 더 이상 어색하지 않은 사람 캐릭터 등 기술적으로는 분명 뛰어났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처음 느낌은 이전 작품보다 못했다. "지난 10년 동안 최고의 픽사 작품"(이동진), "픽사 영화 중에서도 맨 앞에 세울 만하다"(이용철)처럼 평론가들이 만장일치로 최고의 평가를 내렸지만 내게는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 이야기들의 나열 같았다.
 
 픽사의 23번째 애니메이션 <소울>에서는 아름다운 가을 뉴욕의 사실적인 풍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픽사의 23번째 애니메이션 <소울>에서는 아름다운 가을 뉴욕의 사실적인 풍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 디즈니


조가 아닌 영혼 22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보자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는 영화를 조를 중심에 두고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조의 시선으로 보면 꿈을 이루기 위해 성공만을 좇으며 살아가던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반추하며 주변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찾는다는 식상한 이야기이다. 이 계기는 갑작스런 사고, 기억상실로 평범한 이들과 머물게 되는 방식도 있고 소울처럼 영혼이 바뀌는 방식도 있다. 뒤바뀐 상황에서 난처해하는 주인공의 좌충우돌 코미디로 이어지다 마지막에는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교훈을 주는 방식으로 끝나는 일종의 클리셰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가 아닌 영혼 22의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들이 보인다. 영혼이 지구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불꽃이 중요한데 조는 불꽃이란 자신이 재즈에 빠져 있는 것처럼 간절히 원하는 꿈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말미 22가 찾은 불꽃은 꿈보다는 평범한 일상의 행복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일상의 행복이 조의 이야기에서 보이는 것과 같지는 않고 영화에서도 명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조가 22가 하루 동안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물건들을 늘어놓는 장면에서 힌트를 찾아 보았다. 미각(피자, 사탕), 청각(지하철의 버스킹), 시각(파란 하늘), 촉각과 후각(나뭇잎) 등 몸의 감각이 22의 불꽃이라 보았다. 22가 1000년 동안 자신만의 불꽃을 찾을 수 없었던 건 영혼으로서는 이런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게 뭐 대단한 건가 싶을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하고, 대중매체를 통해 쏟아지는 시각, 청각 재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복 내지 혜택을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유한하고 나약한 육체를 가졌기에 겪게되는 여러 고통들이 있다. 또 육체의 감각만에 치중한 나머지 쾌락에 빠져 자신을 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22를 보며 난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오감의 행복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소울>에서 22는 영혼의 세계에서는 피자를 먹어도 아무 감각을 못 느꼈기에 그 즐거움을 알 수 없었다. 육체를 갖고서 22는 피자 맛에 흠뻑 취한다

<소울>에서 22는 영혼의 세계에서는 피자를 먹어도 아무 감각을 못 느꼈기에 그 즐거움을 알 수 없었다. 육체를 갖고서 22는 피자 맛에 흠뻑 취한다 ⓒ 디즈니

 
다음으로는 멘토들이 22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에 대한 멘토들의 교육 방식이었다. 태어나기 전 영혼들은 관리자 '제리'를 통해 6가지 성격 특성을 부여받고 멘토들의 지도를 받아 자신만의 불꽃(Spark)을 찾아야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저마다의 불꽃을 찾도록 도와주는 방식은 당신의 전당으로 번역되었던 '유 세미나(you seminar)'이다. 이는 훌륭한 삶을 산 멘토들이 자신의 인생과 업적이 진열된 전시장에서 영혼들을 교육하며 동기부여를 하는 방식이다. 마치 "나의 삶이 참 멋지고 훌륭하지? 어때 너도 벅차지 않니? 이런 멋진 꿈을 가져보렴"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이곳에서 22는 아무리 훌륭한 멘토를 만나도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한다.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긴 구텐베르크, 앙투아네트, 링컨, 마더 테레사, 토머스 에디슨 등과 같은 위인들을 만났을 때도 22의 감정과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위인들이 22를 포기하고 떠난다. 

그런데 앞서 22가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오감이 그의 불꽃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오히려 극도의 정신적 완성을 추구했던 위인들이 22에게는 최악의 멘토였던거다.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사회 교육 역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행복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정신 육성을 위한 정보는 넘쳐나고, 그마저도 지식을 꾸역꾸역 넣는 방식이며 그게 공부의 다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김영민 교수는 대학입시의 문제점은 단지 가혹한 경쟁이나 청춘의 덧없는 소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공부를 싫어하게 만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학교에서는 일상의 공부, 정신만이 아닌 육체를 통한 공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교육으로 인해 청소년, 청년들은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늘 미래의 무엇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며 괴로워한다. 삶은 끊임없이 유예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혼 22라는 숫자가 22살 청년을 뜻하는 느낌이다. 6.25 전쟁 후 하루 하루 생존에 벅찼던 60~70대, 한국 사회가 정치, 경제에서 고도로 발전해가는 중에 자신의 일에서 성공을 위해 매진했던 40~50대가 보기에 20~30대는 나약하고 패기가 없어보이며 무기력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22에 감정 이입해보면 이렇게 항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이전 세대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들의 기준에 따라 잘못된 게 아니라 당신들과 다른 것 뿐이에요."
 
그렇다. 맛보고, 듣고, 보고, 만지고 몸의 행복한 감각을 느끼며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인생은 완전할 수 있다.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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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및 사회적경제 연구자, 청소년 교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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