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00>의 한 장면

영화 <800>의 한 장면 ⓒ 퍼스트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선 항일투쟁은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사에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부분이다.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는 중국까지 침략했고, 이 과정에서 난징대학살 등 수많은 양민 학살과 파괴가 자행되기도 했다.
 
중국영화 <800>은 난징대학살의 배경이 된 상하이사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맞서 상하이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운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의 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천국과 지옥의 교차

때는 1937년의 가을의 상하이, 그해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상하이로 진격하는 일본군에 계속 밀리던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상하이에서 사행창고를 교두보로 마지막 격돌을 준비한다. 중국 국민혁명군 524연대 1대대가 최후의 보루로 삼았던 사행창고는 네 개의 은행이 함께 만들었던 창고로 벽두께가 두꺼워 파괴가 쉽지 않은 요새와도 같은 곳이었다.
 
당시 상하이는 쑤저우강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이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1842년에 맺어진 난징 조약에 의해 서구열강이 조차지를 설정해 영국과 미국 프랑스 등의 공공조계지가 설정된 상태였고, 조계 지역에는 부유한 중국인들도 거주하고 있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치열한 전쟁이, 반대편에서는 화려한 불빛과 함께 파티와 도박이 이어지고 있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한 공간에서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고 있는 것으로 한쪽에서는 죽기 살기로 맞서며 끊임없는 희생자가 생길 때 지척의 강 건너편 조계지에서는 밤새 흥겨운 음악과 춤이 이어진다. 어떤 병사의 푸념처럼 '천국과 지옥이 교차'하고 있던 상하이였다.
 
신식무기와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본군 2만 명에 맞서 국민혁명군 800명은 잇따르는 희생 속에 병력이 계속 줄어들지만 최대한 버텨 내며 처절한 항전을 이어간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강 건너 조계지에서 구경꾼처럼 지켜보는 중국인들은 가슴 졸이면서 때로는 직간접적인 지원을 위해 애쓰기도 한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영화 <800>의 한 장면 ⓒ 퍼스트런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의 공세 속에 사행창고를 사수하려는 중국 국민혁명군에는 다양한 군상들이 엿보인다. 
 
죽기를 각오하고 온 몸을 던지는 병사에, 적을 피해 어떻게든 전장을 빠져나가려는 탈영병, 위험을 뚫고 조계지에서 강을 건너 사행창고로 찾아온 학생들. 국민혁명군의 내부를 염탐해 일본군에게 정보를 팔아먹는 중국인까지 포화 속의 현장은 혼돈 그 자체다.
 
강 건너편에서 전쟁을 흥미롭게 불구경하듯 쳐다보는 중국인들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 그들은 나름의 동포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반추하는 항일투쟁의 역사
 
흔히 모든 전쟁영화는 반전영화라고도 한다. 하지만 <800>은 반전보다는 침략자에 안일하게 대처했을 때 겪어야 하는 아픔을 되새긴다는 점에서 다르게 보인다. 죽음을 무릅쓰고 결사 항전을 치른 전사들을 기억하는 영화로, 지금의 국가와 민족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희생에 근거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행창고 전투는 역사적으로 중일전쟁에서 일본에 크게 밀린 중국이 그나마 가장 잘 싸운 사례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사행창고처럼 싸웠다면 아마도 중국이 중일전쟁에서 그토록 심한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 사행창고에서의 강력한 저항에 다소 주춤했던 일본은 이후 난징으로 진격해 난징대학살의 만행을 자행한다.
 
전쟁영화로써 <800>의 볼거리는 생생한 전투 장면이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 웅장한 규모로 연출한 전쟁의 실상은 처참하면서도 몸서리쳐진다. 항일투쟁을 담은 중국의 영화들은 대부분 거친 화면으로 당시의 지옥 같은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800>도 마찬가지다. 총을 들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쏠 수밖에 없고, 적을 죽여야 하는 상황은 전쟁이 초래하는 아픔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영화 <800>의 한 장면

영화 <800>의 한 장면 ⓒ 퍼스트런

 
전투 가운데도 국기 게양의 의미를 강조하며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과 강 건너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감격해 하는 중국인들의 표정에는 뿌리 깊은 중화사상이 서려있다. 중국식 국뽕영화로 볼 수 있을 만큼 국가주의적 성향이 엿보이도 한다.
 
그럼에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처럼, 지나간 역사를 반추하고 돌이켜 본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의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우리에게도 항일투쟁은 동질감을 갖게 만든다.
 
1937년 10월 26일부터 11월 1일까지 벌어진 사행창고 보위전은 중국 공산당과 대립했던 장개석의 국민혁명당이 치른 전투였고, 옥상에 게양되는 깃발도 중국의 오성홍기가 아닌 대만의 청천백일기였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도 인정할만큼 용맹스럽게 싸운 전투로 평가받으면서 중국에서 제작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 때문에 검열에서 다소 진통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는 장면에서 청천백일기가 떨어지는 장면이 나오고, 국기에 클로즈업을 맞추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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