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알토미디어(주)
03.
이제 시작되어 버린 마틴의 욕망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선박 노동자가 아닌 작가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초조하고 성급하다. 그 내면의 사정까지 깊이 알아차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 마음의 시작점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엘레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가진 격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함. 그는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는 길 대신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책들을 제 뜻대로 해석하고 자신이 바라본 세상을 거침없이 표현해 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사정에도 이해는 간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돈 걱정없이 자란 엘레나와 달리, 그는 지금 당장 내일을 사는 것도 빠듯한 사람이다. 하루 빨리 '격'으로서의 자격이든, '작가'로서의 자격이든, 무엇이든 빨리 획득해야 하는 이유가 비단 사랑하는 여인을 잃지 않기 위함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과거도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내키지는 않지만 수련 없이는 제대로 된 직업적 소양을 쌓을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대학의 문도 두드려 본다. 그 일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단순히 상식이 떨어지는 선박 노동자라는 사실뿐이지만.
사실, 그가 작가가 되길 바라게 된 것 또한 하나의 우연처럼 여겨진다. 만약 그에게 주어진 것이 책이 아닌, 이젤과 붓이었다면 화가를 꿈꾸게 되었을 것이고, 피아노와 악보였다면 연주가를 꿈꾸게 되지는 않았을까? 다시 말하자면, 그 시점의 마틴은 '자신이 무엇이 되길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그것뿐이었기에' 그 길을 꿈꾸게 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엘레나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 우연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04.
스쳐 지나가는 우연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없다. 잘 다듬어진 채로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우연을 우리는 훗날 뒤돌아 보며 다행이라고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우연은 신기루와 같으니까. 그리고, 불행은 그 신기루 같은 우연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에덴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우연, 그 우연의 사랑을 받게 된 우연, 그리고 작가의 길을 꿈꾸게 된 우연. 세상이 원하는 표현이 아닌 자신의 표현으로 써 내려간 습작들을 엘레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습작들은 반송되어 돌아온다.
이 무렵부터 그는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간다. 자존심에 그녀가 제안하는 일자리도 거절하지만 식료품 가게의 외상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간도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 마틴에게 엘레나는 현실적인 생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지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사랑이라는 조악한 단어로 변명하며 자신이 바다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있다는 말까지 내뱉는다.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을 그녀가 그의 생계를 걱정할 때까지도 그는 꿈만 안고 산다.
꿈꾸지 않고 삶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던 마리아 아주머니의 말이 선명하게 자국을 남기는 이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틴은 엘레나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온갖 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녀가 지켜보는 바로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