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잘못 선택했다. 별 기대도 없던 영화를 보다 펑펑 울어 버렸다.
아무 생각없이 플레이한 영화는 <아이 캔 스피크>. 척 봐도 조금 웃기면서 잔잔하게 흘러갈 영화라고 생각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한동안 잊고 지낸 내 탓이 컸다. 이렇게 뒷골이 당길 정도로 후두를 강타할 줄이야.
이야기는 재개발 상권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음모를 꾸며 재개발을 하려는 세력들과 이를 막으려는 한 할머니(옥분)의 고군분투. 그리고 이를 외면하는 구청 직원들과의 갈등. 시작은 그랬다. 그러던 중 원칙주의 9급 공무원 민재의 영어 실력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민원을 그만 넣을 터이니 영어 공부를 시켜달라는 것. 모종의 거래로 어쩔 수 없이 시작된 관계였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위한 만남이 거듭될수록 옥분의 말하지 못한 아픔이 드러난다.
곧 없어질지도 모를 상권의 아픔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그녀는 사실 위안부 피해자였다. 잊혀 질 위기에 있는 위안부 생존자의 억눌린 억울함과 답답함을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된 상권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대신했던 옥분의 마음이 아주 조금 헤아려졌다. 이제 그 목소리를 자신과 역사를 위해 내기로 결심한 옥분. 미 의회에서의 증언을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하고 우여곡절을 거쳐 감동스러운 연설을 마무리한다.
영화의 중반부부터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쳤다.
'아. 너무 아프면 말할 수도 없는 거구나.'
영어만 할 줄 알면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던 미 의회 증언에서 옥분은 얼어붙는다.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심한 아픔은 말로 치환하기 쉽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꼈다고나 할까. 말할 수 없는 아픔이란 표현과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드러내기 위한 표정, 흘러내릴 눈물이 주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옥분이 오랜 기간 준비한 것은, 아마도 영어가 아니라 마음일 테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품고 있던 아픔과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낼 수 있었던 건, "How are you, 옥분?" 한 사람이 전한 안부였다. 준비된 마음을 향한 진심 어린 노크.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이성의 문제가 아닌,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는 감정의 문제다. 가끔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크게 관심이 없는 듯하다.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 그러고는 자꾸 말해보라고 한다. 얼마나 아픈지. 말해야 알지 않겠냐고. 진짜 아픈 것 맞냐고. 그렇게 자꾸 대답을 요구하고 확인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