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하워즈 엔드> 포스터

영화 <하워즈 엔드> 포스터 ⓒ 알토미디어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은 90이 넘은 노장의 관록을 자랑하듯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각본가이기 전에 연출가였다. 최근 제임스 아이보리의 연출작이 리마스터링돼 재개봉했다. 첫 번째가 <모리스>였고, 두 번째가 <전망 좋은 방>, 세 번째가 <하워즈 엔드>다. 세 작품 모두 영국의 문호 E.M 포스터와 머천트 아이보리 프로덕션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성과물이다.

그의 인장답게 제임스 윌비, 줄리안 샌즈, 사뮤엘 웨스트로 이어지는 금발 남성 캐릭터의 계보를 찾아보는 재미와 클래식한 20세기 초 배경에 아름다운 집과 정원, 그리고 클래식이 흐른다. 이 영화로 엠마 톰슨은 제65회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문학이 영화화된 좋은 예라 할 수 있는 20세기 마스터피스 중 하나다. 그가 만든 문학의 영화화를 더욱 탐닉하고 싶다면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남아있는 나날>을 추천한다. 엠마 톰슨과 안소니 홉킨스가 다시 호흡을 맞추었다.

20세기 초 영국 계층 간의 생각 들여다볼 기회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 알토미디어

 
영화는 한 캐릭터에 치중하지 않고 다층적 주인공의 시점을 보살피는 구조다. 캐릭터 간 촘촘하게 직조된 우여곡절이 갈등과 거듭된 반전으로 재미를 더한다. 표면적으로는 독일계 슐레겔 집안과 영국계 윌콕스 집안의 인연이자 계급과 성(性)별 대립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단절된 것들의 연결이며 관계의 화해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보면 상류층 윌콕스 집안의 재산 중 하나였던 '하워즈 엔즈'를 둘러싼 복잡 미묘한 갈등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초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과 자립을 이루어가는 여성의 성장으로 봐도 좋다.

크게 상류층, 중산층, 하류층 계급이 등장한다. 관습에 얽매인 세속적인 상류층 윌콕스 집안과 지적인 이상주의자이자 중산층 슐레겔 자매로 대표된다. 내부적으로 윌콕스 집안에서는 아버지 헨리(안소니 홉킨스)와 아들 찰스(제임스 윌비)의 갈등이, 슐레겔 집안의 현실적 이상주의자 마거릿(엠마 톰슨)과 극단적 이상주의자 헬렌(헬레나 본햄 카터) 자매의 갈등이 시종일간 지속된다.

마지막으로 이상과 현실의 차이가 큰 하류층 노동자 계급 레너드(사뮤엘 웨스트)가 있다. 그는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한 대가로 가난에 찌들어 있다. 경제적인 지원을 한 푼도 받지 못하고 가문에서 사실상 내처 진 상태다. 그러나 결혼을 그저 사랑만이 아닌 책임감과 약속으로 생각하는 신사다. 부끄럽지 않은 행동과 정직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아내 재키를 부양하고 있다. 늘 지적인 소양을 갈구하나 가난한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자격지심이 크고 자주 혼자 상처받는 외골수다. 자신의 의지가 아님에도 불운이 계속되는 안타까운 사람이다.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 알토미디어

 
어느 날 레너드는 연주회 장에서 실수로 우산을 잘못 들고 간 헬렌을 집까지 쫓아간다. 그곳에서 마거릿, 헬렌, 티비로 구성된 슐레겔 남매와 만난다. 이렇게 네 사람은 지적, 예술적 견해를 교환하며 친분을 쌓게 된다. 특히 헬렌은 책 속에서 배운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이상주의자로 자신의 믿음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후에도 헨리가 잘못 알려준 정보로 레너드가 직장을 잃자 자신의 일처럼 나서 해결하려 고군분투한다.

한편, 슐레겔 남매는 최근 이웃이 된 윌콕스 집안 때문에 불편하다. 하워즈 엔즈에서 그 집안의 차남 폴과 사랑에 빠져 곤경에 처한 헬렌 때문이다. 이후 헬렌은 완벽한 상류층의 모범이라 생각해왔던 윌콕스 집안과 등 돌리게 된다. 헬렌의 마음은 알지만 이웃끼리 앙금이 쌓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마거릿은 용기 내 윌콕스의 집을 찾는다. 가족들은 모두 없고 덩그러니 루스(바네사 레드그레이브)만이 손님을 맞는다. 의외로 두 사람은 편한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집안을 대표해 오해를 풀고 친분을 유지하게 된다.

집, 그 이상의 의미 하워즈 엔드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 알토미디어

 
그 중심에는 영국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하워즈 엔드'가 있다. 런던 근교의 하워즈 엔드는 특별한 영혼의 안식처이자 그 이상을 상징한다. 동시에 두 집안의 갈등의 씨앗이면서 화해의 장으로 쓰인다. 하워즈 엔드는 루스 윌콕스 부인이 태어난 집이자 오빠가 물려준 재산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소유물이다. 루스는 가족이 아닌 마거릿에게 선물로 하워즈 엔드를 주려 했다. 가족들은 임종 직전 연필로 쓴 효력 없는 유언장이라며 이 사실을 함구한다.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당시 인습을 고려해보면 여성의 재산도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 남성의 일부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는 여성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나눈 사람에게 준 선의조차 용납할 수 없는 권위를 상징한다.

이 선봉에는 오만하고 위선적인 가장 헨리가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고상한척하는 부자다. 양손에 떡을 가지고도 입에 하나 더 넣고야 마는 야심에 찬 사람이다. 그러나 병약했던 아내 루스가 세상을 떠나고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거릿을 아내로 맞이하기도 한다. 그 후 부도덕한 과거를 마거릿에게 들키는 부끄러움도 용서받게 되는 인물이다. 현명한 마거릿을 만나 오해의 매듭을 풀고 정신적 고양을 향상시킨다.

결국, 루스의 처음 바람대로 영적 후계자로 점찍었던 마거릿으로 연결이 이루어지는 모양새다. 하워즈 엔드의 열쇠는 돌고 돌아 마거릿을 찾아온다. 하워즈 엔드는 헬렌의 아들, 즉 조카에게 물려준다는 약속까지 받아내면서 말이다.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가족이 우선권을 갖는 관습을 따르지 않고 가장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 이행을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게 된다.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영화 <하워즈 엔드> 스틸컷 ⓒ 알토미디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 영화처럼 보이나 보수와 진보의 대립을 유려한 문학적 기교로 풀어냈다. 부자들의 위선을 들추며 사랑의 의미, 여성의 자립, 집이 갖는 위안 이상의 것들을 논한다. 집은 소유할 수 있으나 자신에게 꼭 맞는 안식처를 찾기 어렵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142분이란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엠마 톰슨의 우아한 모습과 억양이 계속 잔상에 남는다. 20세기 초 복식과 헬레나 본햄 카터의 귀여우면서도 당찬 모습이 지금과도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보수적인 남성적 사회에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행보가 돋보인다.
히워드 엔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