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 '조두남' 친일의혹 규명 촉구지난 2003년 6월 경남지역 30여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이 마산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작곡가 조두남 선생의 친일 의혹 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룡정의 노래>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해방 1년 전에 창작된 노래다. 해방 뒤에 그는 이 노래의 가사를 바꾼 뒤 제목도 <선구자>로 바꾸었다. 별로 아는 이가 없었던 이 노래가 국민적 애창곡이 된 계기는 5·16 쿠데타 2년 뒤인 1963년에 찾아왔다.
전년도인 1962년에 객지인 남한 땅에서 한국예총 지부장이 된 그는 <선구자>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는 계기를 1963년에 맞이한다. 2002년 11월호 월간 <말>에 실린 연변 작가 류연산의 기고문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 그 사연이 소개돼 있다.
"1963년 12월 30일 서울시민회관에서 바리톤 김학근이 불러 유명해졌다고 하고, 그 뒤로 기독교방송국에서 '정든 우리 가곡'의 시그널 뮤직으로 7년간 방송됨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구자>가 유명해지자 그는 창작 동기를 독립운동과 연관시켰다. 그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일례로 2015년 12월 발행된 <관훈저널> 제137호 같은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관훈저널>은 그의 거짓말을 최초로 실은 간행물이 아니라, 이전에 숱하게 회자되던 그의 창작담을 옮겨놓은 간행물에 불과하다. 이 책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32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당시 목단강변에 살고 있던 그를 한 청년이 찾아왔다. 이름은 윤해영. 그 청년은 시를 한 편 내밀고는 작곡을 부탁하고 떠났다. 제목은 <룡정의 노래>였다."
<관훈저널>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조두남은 1968년 기독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룡정의 노래> 즉 <선구자>의 창작 동기를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만주로 많이 망명하지 않았습니까? 나라를 찾겠다고 목숨을 바쳐 싸우던 독립투사들이 왜적의 총칼 아래 무참히도 쓰러져 가지 않았습니까? 이 쓰러져 간 독립투사들을 조상(弔喪)하며 만든 것이 <선구자>입니다."
1932년에 작사자 윤해영이 가사만 남겨놓고 사라진 뒤에 자신이 곡을 붙여 <선구자>를 만들었으며, 이 노래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작품이었다는 게 조두남의 설명이다.
이 말이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은 앞서 소개한 그의 프로필에서 드러난다. 그는 윤해영이 1932년에 가사만 남긴 채 사라진 뒤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윤해영은 1941년에 <아리랑 만주>를 작사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2년 뒤 이 노래에 조두남이 곡을 붙였다. 이는 1941년 이후에 두 사람이 연락을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두남은 1932년경에 <선구자>의 곡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게 거짓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2년 동안에 조두남은 물론이고 윤해영과도 음악 활동을 함께한 김종화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이 인터뷰는 요녕민족출판사가 펴낸 <두만강> 4집에 소개돼 있다.
김종화는 조두남과 윤해영의 노래를 기타로 연주한 음악가다. 두 사람의 음악에 대해 상당히 잘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김종화의 증언과 관련해 1996년 11월 27일자 <한겨레신문>은 "항일 독립의 기상을 표현한 가곡 <선구자>의 원 제목은 '룡정의 노래'였으며 가사도 현재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고 중국의 한 조선족 음악가가 주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그는 '룡정의 노래'가 44년 봄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시 인근의 닝안(영안)에서 열린 조두남씨의 신곡 발표 공연에서 첫 선을 보였다면서 당시 가사에는 '활을 쏘던 선구자'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따위의 구절은 없었으며, 그 대신 '눈물의 보따리' '흘러온 신세' 같은 유랑민의 설움이 주조를 이루었다고 돌아봤다."
김종화는 기타로 <룡정의 노래>를 연주했다. 그런 그가 '<룡정의 노래>와 <선구자>는 곡조는 같지만 가사는 다르다'고 증언했다. 독립운동과는 전혀 관계없는 노래였다고 증언한 것이다.
위의 월간 <말>에도 김종화의 인터뷰가 소개돼 있다. <말>에서도 그는 "한국의 책을 보면 <선구자>는 1932년에 창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건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라면서 "당시 룡정에서 불렸다고도 하는데, 그때 룡정에서 살았거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부른 적이 없었답니다"라고 증언했다.
치명적인 문제를 내포한 노래 '선구자'
▲2003년 5월 30일 개관식 이후 시민단체 등의 항의로 인해 폐쇄됐던 조두남기념관은 이후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오마이뉴스 윤성효
<선구자>와 관련해 조두남은 중요한 부분들에서 거짓말을 했다. 친일파인 자신이 독립투사를 위해 작곡을 했다고 말했다. 윤해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정도라면, 조두남의 말에 신빙성이 낮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김종화의 증언에 무게가 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된다.
조두남의 말이 신빙성이 낮다고 볼 때, 그가 '룡정의 노래'의 발표 시점을 1944년이 아닌 1932년으로 앞당긴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944년은 조두남이 한창 친일 활동을 할 때였다. 그래서 1944년에 지은 노래는 친일을 위한 작품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독립운동과 무관한 작품으로 추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판단을 막고자, 자신이 만주에 이주한 첫 해인 1932년에 이 작품을 지었다고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친일활동을 하기 이전에 지은 것처럼 보여주고 싶었을 수 있다.
이처럼 <선구자>는 치명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한 노래다. 작사자 윤해영뿐 아니라 작곡자 조두남도 친일파인데다가, 조두남은 창작 경위와 관련해 거짓말을 많이 했다. 이 작품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기까지 했다. 친일을 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독립운동과 연관시키는 '더 큰 악'을 범한 것이다.
이 고약한 '선물'을 우리에게 남긴 조두남은 오랫동안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1982년 10월 18일자 <경향신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선구자>는 대통령이 등장하는 행사에서 배경 음악이 되기도 했다.
조두남은 <선구자>를 자신의 등장 때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했던 전두환의 보살핌도 받았다. 1982년 3월 3일자 <경향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조두남은 전두환을 통해 생활비 및 의료비 지원도 받았다. 조두남은 1984년 11월 9일 죽었다. 사망 직후 전두환은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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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