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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MBC < PD수첩 > 녹화현장

▲ 'PD수첩' MBC < PD수첩 > 녹화현장 ⓒ 이정민

 
프로듀서들이 시사 문제를 취재해 심층 탐사 보도하는 것을 일컫는 'PD 저널리즘'. 1980년대, 정부의 언론 통제와 어용 뉴스, 출입처 중심 보도에 반발해 등장했다. 1990년 첫 방송된 MBC < PD수첩 >의 역사는 PD 저널리즘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D수첩 >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 PD 저널리즘은 '저널리즘의 진수'였으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에게는 '사이비 저널리즘'이라며 폄하되기 일쑤였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보도 당시에는 보수 정치인들로부터 "이념적 편향이나 정치적 의도로 사실을 왜곡할 위함이 크다"는 비판받기도 했다.

"하나 둘 실험하던 시기에 본격적인 탄압 시작됐다"
 

 MBC < PD수첩 > 녹화 현장. 손정은 아나운서가 내레이션을 녹음중이다.

MBC < PD수첩 > 녹화 현장. 손정은 아나운서가 내레이션을 녹음중이다. ⓒ 이정민


- < PD수첩 > 흔들기가 곧 'PD 저널리즘 흔들기'였다. 그때마다 'PD 저널리즘은 팩트가 부족하다'는 말이 등장했는데, 그래서 팀 내 팩트체크팀을 만들고 모든 취재 내용을 데이터화 하는 시스템 구축 필요성을 느낀건가. 
한학수 앵커(아래 한) : "2005년 즈음 최승호 사장과 박건식 부장이 PD로 있을 때부터 많이 고민했던 것들이다. 당시는 PD저널리즘의 전성기였는데, 이 내용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과학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개별 PD들의 개인기나 의지 말고, 지속 가능한 취재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런 고민이 싹트고 하나 둘 실험하던 시기에 프로그램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진행됐고, 망가져버렸던 거다."   

박건식 CP(아래 박) : "< PD수첩 >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들 중 하나가 '기자는 팩트고 PD는 주장이다', '팩트가 부실하다'는 거였다. 우린 동의하지 않지만, 관련 논문도 많이 나왔다. 이런 지적이 이어지다보니 내부적으로 팩트를 더 튼튼하게 해야할 필요를 느꼈다. 최승호 사장이 미주리 대학교에 가서 탐사보도 관련 공부를 하고 왔다. '검사와 스폰서' 편 할 때만해도 전국 검사 인명록을 다 집어넣고, 공무원 인사 청문회나 선거 때면 관련 데이터, 기부금 내역 등등 전부 다 넣었다. 우리끼리 '곧 국정원도 능가하겠다'고 농담할 정도의 빅데이터를 만들고 있었는데 다 망가졌다. 

결정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련 보도 이후 엄청난 홍역을 앓았다. 수많은 공격이 이어졌고, 결국 팩트로 다퉈야 했다. 팩트를 더 단단하게, 작은 빌미도 주어선 안 된다는 인식이 공유됐다."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제작진은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 선고를 받았다. - 기자 말)

: "사소한 꼬투리가 얼마나 프로그램을 압박할 수 있는가, 어떤 빌미도 주어선 안 된다는 뼈저린 성찰이 있었다. 이 부분을 넘어서야 한걸음 더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으로 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생겼다."

: "황우석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얼마나 엄청난 공격이 있었나. 제작진에게 묻은 먼지 하나까지 털던 시기였다. 만약 줄기세포가 하나라도 제대로 살아있었다면 한학수 앵커는 지금 살아있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 PD수첩 >의 영향력이 한국 사회를 움직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는 이야기이지 않나. 더 엄정하고 엄중하게 사실을 확인해야할 책임을 느꼈다. 그 위력의 크기를 실감한 계기였다." 

: "칼이 커질수록 더 신중하게 휘둘러야 한다. 제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팩트체크와 데스킹이 필요했다. 그래야 기무사든, 국정원이든, 종교든, 우리 사회의 거대 권력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조금만 삐끗해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소송과 맞서야 한다." 

: "소송뿐이 아니다. 조계종 한 번 잘못 다루면 방송 송출이 안 된다. 송신소들이 전부 조계종 산하에 세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하인드지만, 조계종 전 총무원장의 비리를 다룬 '큰 스님께 묻습니다' 편 방송 뒤에 조계종에서 MBC 직원들 송신소 출입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시청자들의 신뢰다. 의도치 않은 작은 실수 하나에도 엄청난 사회적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한 번 잃은 시청자 신뢰를 다시 얻기도 쉽지 않고." 
 
"강제로 쫓겨난 뒤, PD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게 돼"
 

'PD수첩' MBC < PD수첩 > 녹화현장

▲ 'PD수첩' MBC < PD수첩 > 녹화현장 ⓒ 이정민

   
한학수 앵커는 2005년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을 보도해 < PD수첩 >의 전성기를 이끈 스타 시사 PD였다. 박건식 CP는 치과 치료 중 감염 사례를 보도한 '치과의 위험한 비밀'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명박 정부의 탄압이 시작된 뒤 '저성과자'로 분류돼 현업에서 배제됐었다. 

- 비제작부서에 있는 동안, < PD수첩 >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  
: "어두웠던 시절에 귀양살이 몇 년 하다 보니 프로그램 귀한 줄 알겠더라. < PD수첩 >은 시사교양국 안에서도 3D로 불릴 만큼 일하는 동안은 참 힘든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강제로 쫓겨나 일을 못하다보니 내 자신에게 프로그램이 무엇이었는지, PD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게 되더라. 조선시대에도 귀양살이하면 책을 몇 권씩 쓴다더니 딱 그짝이었다. 시청자들과 프로그램을 통해 생각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지금도 사실 더할 나위 없이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행복하다." 

: "MBC 시사교양 PD들에게 < PD수첩 >은 자부심이자 상징이다. 하지만 평상시에는 힘들고, 어렵고, 귀찮기도 했던 프로였다. 그런데 떠나고나니 얼마나 소중한 프로그램이었는지 알겠더라. 경인지사에 있는 동안 매일 경의선 타고 출근했다. 앉아서 졸다보면 수색역을 지나 (상암동) MBC가 보였다. 한 달 정도는 매일 사진을 찍었던 것 같다. 지켜만 볼 수 있고, 올 순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때마다 '돌아가면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과거에는 < PD수첩 >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 PD수첩 >이 보도하는 이슈에 모두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매체, 채널도 다양해졌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청자들에게 < PD수첩>의 존재 의미를 어필하고 있나. 
: "나는 저널리즘에 있어서, 기자든 피디든, 아나운서든 1인 미디어든, 모두 그 근본은 같다고 생각한다. 다만 < PD수첩 >이라는 프로그램에 1990년대에 생긴 배경에는 양비론에 치우치지 않는 진실 탐구와, 뉴스에서는 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 우리 프로그램이 가혹한 조건에 놓였던 시기가 있었다. 뭘 하나 제대로 보도하려고 해도 족쇄가 너무 많았고, 제약이 많았다. < PD수첩 >이 제 역할을 못했던 시기는,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얻어야할 혜택을 빼앗은 시기나 다름없다. 괴로웠던 시기다. 우리는 모두 그 시기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 마음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박 : "이명박근혜 정권 동안, 우리는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청자들에게는) 가해자였다.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못해) 시청자들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 그 마음을 다시 얻는 일은 김재철-안광한-김장겸을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과정일 거다. 지난 시간 세상은 많이 변했고, 사회적 관심도 더 이상 우리에게 쏠려있지 않다. 이 시대 변화의 흐름을 단기간에 따라잡기란 쉽지 않겠지만, 우리 모두 과제라 여기며 일하고 있다. 여전히 부족하다. 사실 지금 내부 구성원들이 모두 지친 상태다. 하지만 2017년 11월, 제작 거부를 끝내고 'MBC 몰락, 7년의 기록'을 준비하던 그때 그 마음을 잃지 않겠다."  

PD수첩 한학수 박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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