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마틸다>의 주인공 마틸다와 트런치불 교장이 마주보고 서있다.
신시컴퍼니
그런데 사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트런치불은 끔찍하기는 해도 이 세상 최고로 잔인한 흉악범은 아니다. 길을 지나가는 어른들을 붙잡고 가장 무서운 사람들 생각해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잔인한 살인마, 범죄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마틸다> 속 트런치불은 조금 다르다. 그는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어른'이다. 2m에 가까운 키, 살찌고 커다란 몸, 쭉 찢어진 눈, 볼에 붙은 커다란 사마귀 점 등 겉모습부터 심상치 않다. 트런치불이 아이들에게 벌주는 방식도 독특하다. 초코 케익을 훔쳐 먹은 아이에게는 커다란 초코 케익 한 판을 강제로 다 먹도록 했고 말 안 듣는 학생의 귀는 치즈처럼 쭉 늘려 버렸다. 이런 트런치불의 묘사에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묻어 나온다. 우리가 어린 시절 쓴 일기장을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싶은 문장들이 있는 것처럼 바로 그런 아이들의 상상이 모여 못된 악당 트런치불이 태어났다.
마틸다는 똘똘함과 비범함으로 트런치불을 향해 당당히 맞선다. 그 과정에서 트런치불의 그릇된 행동에 분노하며 피해 받는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린다. 우리 중 많은 사람은 모두 어렸을 때 마틸다처럼 예의 바른 행동을 했고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어른들에게 "그러면 안돼"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많은 어른들이 어느 순간 그때의 꿈을 잃고 바쁘게 살고 있다.
콜라를 먹고 싶던 아이가 어른이 된 후
뮤지컬 <마틸다> 중 'When I Grow Up' 넘버에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하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가사를 보면 그 꿈들이 참 소박하다. "매일 콜라를 원 없이 먹을래", "밤을 새고 아침에 잠 들거야" 등 어른이 된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고 사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장면에서 어린 아이들은 그네를 타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어린 아이가 순식간에 큰 아이로 바뀐다. 작은 아이와 큰 아이가 재빨리 그네를 바꿔 탔을 뿐인데 내 마음은 크게 요동쳤다. 마치 저 그네 위에서 훌쩍 자란 아이가 나 같았다. '나도 예전에는 저렇게 해맑았고 작은 행복이 하루의 전부였지' 하면서 말이다. 어른 관객들은 그네 위에 서있던 작은 아이가 조금 더 큰 아이가 되고 큰 아이가 마침내 어른이 되는 모든 과정을 이미 겪었기에 더 울컥한다.
부모님에게 무시당하고 못된 교장한테 괴롭힘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밝고 도전적인 마틸다. 그녀의 당당함에 어른인 나도 의지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도 어른들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마틸다가 더 안쓰러운 이유도 관객들은 어린이들의 그 시기가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 때인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아이들의 귀여운 표정과 순수한 대사야말로 <마틸다>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책 읽지마"
<마틸다> 속 인물들은 크게 어른과 아이들 두 분류로 나눌 수 있다. 어른과 아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물들의 성격에 있다. 우선 아이들은 각각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덤벙대는 아이, 먹을 걸 좋아하는 아이, 친구를 좋아하는 아이 등.
그런데 어른들은 착하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다. 어린이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들을 하는 착한 어른 담임선생님 허니와 도서관 사서 선생님은 마틸다를 유일하게 응원해주는 어른들이다. 나쁜 어른들은 어린 마틸다에게 "역겹다"는 말을 하는 부모님과 트런치불이다.
공연은 끊임없이 관객들에게 착한 어른과 나쁜 어른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공연, 영화 등에서 종종 순수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서 인물들의 성격이나 상황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는 하는데 <마틸다>는 이 점을 아주 탁월하게 활용했다. 그렇다보니 극 내내 인물들이 객석을 향해 "책 보지마"라는 말을 해도 관객들은 책 읽는 행동이 나쁜 행동이 아니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동화 같은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