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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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친일파로 전향한 것은 조선왕조 멸망 5년 전인 1905년이다. 이 해에 러일전쟁이 러시아의 패배로 확정되면서 일본이 단독으로 조선을 장악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여세를 몰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하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을 추진했다.
조선 무대에서 경쟁했던 청나라는 청일전쟁 패전으로 물러나고 러시아는 러일전쟁 패전으로 물러났으므로, 을사늑약이 어렵지 않게 관철되리라는 것과 조만간 조선이 국제법적으로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리라는 것이 이 시기에는 어렵지 않게 예상될 수 있었다.
이처럼 누가 봐도 조선이 일본에 넘어갈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이완용이 갑자기 친일파로 변신했다. 친미파가 되고 친러파가 될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완용은 고종의 태도를 보면서 전향을 결심했다. 그는 일본의 강압 앞에서 고종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고종이 친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일본 때문에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이완용은 친일을 결심했다.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은 "흔히 변신의 귀재라고 불리는 이완용이 최종적으로 친일파로 돌아선 것은 바로 이때라고 한다"라면서 을사늑약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이완용은 을사조약 대책회의에서도 고종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려고 애썼다. 을사조약 대책회의 과정을 보면, 그는 조약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종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고, 고종이 자신에게 원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이 1905년 12월 16일자 <고종실록>에 정리돼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을사늑약 요구에 당황한 고종은 그 해 11월 15일 각료들을 불러 대책회의를 열었다. 어느 누구도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고종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일단 미뤄보자"고 말했다. 이때 고종을 유심히 관찰하던 이완용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한마디가 있다. 이 한마디가 고종의 마음을 흔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만약 폐하의 마음이 단호하셔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부득이하게 허용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신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다행이지만, 과연 그럴 의지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의지가 없다면 차선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그냥 체결해버리는 게 어떨까요?'라는 메시지와 다를 바 없었다. 고종은 답변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조약체결 여부를 각료들에게 일임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이완용한테 일임한 것이다. 결국 을사늑약은 통과됐다.
이처럼 이완용은 1905년 연말에 고종의 눈치를 봐가며 친일파로 변신했다. 고종이 친일로 돌아선 것은 아니지만, 일본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돌아섰다. 친미파·친러파가 될 때는 고종보다 한 발 뒤에 있었던 데 비해 이번에는 한 발 앞섰다는 점이 달랐을 뿐, 고종의 눈치를 살펴가며 결단을 내렸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 뒤 이완용은 나머지 5년 동안 '아주 진하게' 친일을 했다. 후세에 두고두고 기억될 정도로, 일본의 조선 강점을 확실하게 도왔다. 그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최소한의 핑계거리를 만들어뒀다. 주군이 일본 앞에서 흔들릴 때 친일파로 변신함으로써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핑계거리를 만들어둔 것이다. 주군의 의중을 반영하는 친일 전향인 것처럼 보일 만한 여지를 만들어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드라마 속 이완익과 다르다. 이완익은 이런 핑계거리도 만들어두지 않고, 단 1%의 원칙도 없이 '무데뽀'로 친일파가 되어버렸다.
핑계거리를 만들어두든 않든, 이완용의 친일 행각이 잘못됐다는 점만큼은 불변한다. 중요한 것은 이완용 역시 오늘날의 철새 정치인들처럼 변절을 합리화할 명분을 만드는 데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이완용도 대의명분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는 화려한 대의명분에 속지 않도록 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 속의 이완익은 현실 세계에 등장하기 힘든 캐릭터라서, 우리 사회가 정치인들의 옥석을 가리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완익 같은 비현실적인 친일파를 드라마를 통해 아무리 많이 봐도, 우리 사회의 친일파 예방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등장할 가능성이 없는 '친일 바이러스'를 드라마에서 아무리 많이 봐도, 우리 사회가 '친일 백신'을 제조하고 친일을 예방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드라마 속 이완익은 우리 사회가 친일파의 진짜 면모를 이해하는 데 지장만 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