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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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것이 굉장히 그로테스크한 판타지라는 데 있다. 아저씨, 그러니까 중년 남성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과도한) 자기 연민을 그려낸 <나의 아저씨>가 시청자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명제가 무엇일까. 바로 '아저씨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드라마는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듯하다. 당신의 주변을 서성이는 수많은 아저씨들은 선량하다. 해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제든지 너를 도와줄 준비가 돼 있다. 그들을 미워하지 마라. 욕하지 마라. 돌 던지지 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청춘을 다 날려버린 안쓰러운 사람들이니까. 변변한 특기 하나 가질 삶의 여유도 누리지 못한 채 술만 퍼마시는 불쌍한 중생들이다. 다가가도 물지 않는다. 해치지 않는다. 왜 선입견을 갖고 아저씨들을 대하는가. 사람 대 사람의 관계를 맺으면 되지 않느냐. <나의 아저씨>의 '아저씨를 위한 찬가'가 참으로 눈물겹지 않은가.
드라마 기획의도는 더 명확하다. "아홉살 소년의 순수성이 있고, 타성에 물들지 않은 날카로움도 있다"는 아저씨. 그에겐 인간에 대한 본능적인 따뜻함과 우직함도 있다. 제작진은 이 박동훈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인간의 매력'을 보여주는 아저씨"를 그리고자 했음을 밝힌다. 이어, 박동훈을 통해 "길거리에 넘쳐나는 흔하디흔한 아저씨들. 허름하고 한심하게 보이던 그들이, 사랑스러워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제작진의 의도는 김원석 감독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극중 아저씨들에 감정이입된 어떤 이들은 드라마가 현실적이라고까지 말한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뉴스를 보자. 아니, 우리 주변에 있는 아저씨들을 떠올려보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여성들의 몸매를 훑어대고, 추잡한 성적 농담들로 하루 일과를 채우고, 회사에선 여직원을 상대로 성희롱이나 하고, 남직원들에겐 지적질과 꼰대질을 아끼지 않는 것이 아저씨. 여성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아저씨들은 이렇다. 아저씨들에게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연대는 '판타지'이지만, 여성들에게는 '공포'다.
미투 운동에 의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도, 대중들의 신망을 받거나 사랑받던 아저씨들이었다.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tvN
"저에겐 단순한 문화취향이었던 것이 어떤 분들께는 당장 눈 앞에 놓인 현실 속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을 뿐 저도 젠더권력을 가진 기득권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조금 더 편한 시각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작가 겸 방송인 유병재는 자신의 SNS에 <나의 아저씨>에 대한 감상평을 올렸다가 팬들과 설전을 벌인 후 공식 사과를 했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연예인이었다면 논란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것이다. 평소 높은 젠더 감수성을 보여줬던 유병재였기에 실망감을 표현하는 팬들이 많았다. 유병재의 빠른, 적절한 사과가 반갑다.
<나의 아저씨>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드라마를 보고서 하는 비판이냐고?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나는 불편하다고. 만약 <나의 아저씨>가 불편하지 않다면, 당신은 이 불편한 세상에 너무도 익숙해져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대한민국의 여성들은 여전히 끔찍한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들은 '묻지마 살인'의 과녁이 되고, 가부장제의 억압과 성차별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이게 현실이다. 그런 여성들에게 아저씨에 대해 연민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말자. 그만큼 잔인하고 무례한 짓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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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길을 가라. 사람들이 떠들도록 내버려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