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송작가입니다.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요. 아이템을 취재하고, 편집 순서를 정하고, 내레이션 원고를 씁니다. 내가 원하던 일이고, 나에게 잘 맞는 일이며, 가끔은 잘 한다는 얘기도 듣습니다.

'생애선택자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건 행복지수와 크게 연관돼 있다고 합니다. UN 지속가능위원회가 발표한 '세계행복지수'에 따르면요. 이 얘기를 들으니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사는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행복지수가 높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원고료 지급은 늘 밀립니다. 정산을 담당하는 PD가 휴가를 갔다며, 정산에서 누락 됐다며, 프로그램이 폐지 됐다며, 가볍고도 무거운 갖가지 이유로 내 노동의 대가는 늦게 돌아옵니다. 아예 못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동료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면 위로가 좀 될까요.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이 폐지되고 편성이 뒤바뀌는 판이기에 오래 두고 속 터놓을 작가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혼과 육아로 일터를 떠나는 일은 예사. 요새는 자궁근종이다 갑상선기능저하증이다,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두는 작가들도 부쩍 늘었어요.

 "오늘 녹화, 잘 해야 할 텐데" 장시간 녹화로 오늘도 몸은 녹초가 된다.

"오늘 녹화, 잘 해야 할 텐데" 장시간 녹화로 오늘도 몸은 녹초가 된다. ⓒ 방송작가유니온


그래도 송출된 프로그램을 보며 힘을 냅니다. 시청자들에게 재미와 위로를 선사하며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내 프로그램.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은 더 나은 세상을 말하는데 나를 둘러싼 내 세상을 내가,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 상황이 말입니다. 어느새 야근과 철야가 당연한 일이 돼 버리고 '이 바닥 원래 그래'라며 편집실에서 시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땐 절망적이었습니다. 내가 밤을 새우니 후배들도 응당 그래야 한다는 고약한 심보를 들켜버렸을 땐 콱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방송작가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 2805시간

2016년 방송작가의 현주소를 담은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작가 600여 명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는 방송작가 단일 직종을 대상으로 이뤄진 첫 대규모 조사 보고서라고 합니다.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꽤 두꺼운 책이죠. 이 보고서엔 방송작가의 일상이 숫자로 정량화돼 있습니다.

주당 53.8시간 근무(근로기준법상 40시간). 시간 당 임금 5715원(조사 당시 최저임금 5580원. 서울시 생활임금 6687원)

눈길을 끄는 분석이 있습니다. 방송작가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2805시간에 달한다고 합니다. OECD 국가의 1인당 연평균 노동시간은 1770시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하는 한국의 노동시간은 평균 2163시간(2014년)입니다. 그러니까 방송작가는 세계적으로 일 많이 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보통 직장인보다 연간 600시간 이상 더 일하는 셈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고 있었구나' 한동안 처참한 기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주당 53.8시간, 연 평균 2805시간 근무하는 방송작가. 세계적으로 일 많이 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일반적인 노동자보다 연간 600여 시간을 더 일한다.

주당 53.8시간, 연 평균 2805시간 근무하는 방송작가. 세계적으로 일 많이 하기로 유명한 한국의 일반적인 노동자보다 연간 600여 시간을 더 일한다. ⓒ 방송작가유니온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습니다. 방송작가 규모 1만여 명. 어림잡은 수치라고 합니다만, 1만이라는 숫자가 마음에 묵직하게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 1만이라는 숫자에는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으며 밤새 원고를 쓰고, 하혈을 하는지도 모른 채 녹화를 버티고, 어린이집 끝나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나'들 1만 명의 사연들이 녹아들어 있었으니까요. 방송국 곳곳에 숨어있는 1만 가지 이야기들이요.

2017년 11월 11일은 방송작가들이 조금씩 스스로를 드러내며 모이기 시작한 날입니다. 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 '방송작가유니온'이 생겼거든요.

노동조합. 아직은 낯선 말입니다. 내레이션 원고에만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내가 노조 조합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날 모인 작가들은 이제부턴 '혼자 울지 말고 폼나게 노조하자'고 약속했어요. 떼인 원고료 끝까지 함께 받아내기로 했고, 사람 잡는 밤샘 작업 그냥 두지 않기로 했어요. 갑질 없는 방송국 우리가 만들기로 했습니다. 혼자 아닌 우리가요. 

작가님들, 이제부턴 '우리 이야기' 해봐요

 2017년 11월 11일 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했다.

2017년 11월 11일 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했다. ⓒ 방송작가유니온


방송작가는 '말을 쓰는 직업'이라고 합니다. 글이 아닌 말을 쓴다는 건, 세상 이야기를 남녀노소 누구든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듯이'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말을 집필하는 우리 방송작가들에겐 공통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드라마로, 라디오로, 다큐멘터리로, 예능으로, 알아야 할 사실과 숨겨졌던 존재를 전하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나갔던 경험 말입니다.

이제 방송작가들의 전매특허인 '말을 쓰는 재주'로 방송작가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매번 밀리는 임금, 숱하게 참아낸 성희롱, 열심히 일해도 후려치기 당하는 방송국 살이에 아직 혼자 울고 있던 작가님 계시다면, 주저 말고 손들어주세요. '나' 여기 있다고요. 이제부터 '우리' 함께 이야기해봐요.

우리의 이야기는 방송국뿐 아니라 저마다의 일터에서 고통받고 있을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장시간 격무를 당연시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노동현장을 바꿔놓을 큰 힘이 될 거예요.

세상을 바꿀 방송작가들의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덧붙이는 글 방송작가유니온 가입 문의 이윤정 수석부지부장 010-2231-1379
페북 https://www.facebook.com/Scriptwriterunion
메일 writersunion@daum.net
카페 http://cafe.daum.net/writerslabor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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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 <방송작가유니온>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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