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촛불을 들자, 낡은 시대가 물러갔다. 새로운 대통령이 뽑히고,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마중하기 위해 분주하다. 교육이라고 다를까. 입시 체제부터 변화를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다. 그런데 과연 한국 교육계에 필요한 것이 새로운 입시 체제일까?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 그간 꾸준히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왔던 EBS <다큐 프라임>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EBS가 새해 첫 주제로 준비한 것이 바로 <번아웃 키즈>이기 때문이다. 지난 3, 4일 그리고 8, 9일에 걸쳐 4부작으로 방영된 이 다큐는 어쩌면 지금 우리 교육에 필요한 건 새로운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아이들을 안심시키고, 괜찮다며 등을 두드리고, 푸르게 자랄 수 있도록 여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큐의 제목 <번아웃 키즈>, 그 수식어인 번아웃(burn-out)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심리학 용어다. 그레이엄 그린의 1960년 작 소설인 <번아웃 케이스>에서 유래된 이 말을 독일 출신의 심리학자 허버트 프레이덴버거가 사용하며 등장했다.

다음 백과에 게재된 내용에 따르면, 번아웃은 타버리다, 소진되다라는 단어적 의미를 그대로 적용한 것과 같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앞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써버린 상태를 말한다. 업무상 스트레스가 많거나 도덕적 요구가 높은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걸리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직업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이 발화돼 한 사람을 소진시켜 버리는 증상이 안타깝게도 2018년 우리의 아이들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특정 학령만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다큐에서 확인했듯 초등학생에서 부터, 고등학생, 심지어 이제 사회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이 될 대학생들조차 이 증후군에서 자유롭지 않다. 도대체 우리 교육, 나아가 우리 사회가 '교육'이란 미명 하에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달리는 돼지와 함께 잠시 '아이'로 돌아간 아이들


다큐 속에서 한 선생님이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선생님은 말한다. "잘 길러서 크면 잡아먹자." 18년 전 일본 오사카 한 고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1년간 아이들과 선생님이 돼지를 키운 이 과정은 TV다큐로 제작,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츠마부키 사토시 주연의 < p짱은 내 친구 >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바로 그 다큐와 영화 속 상황이 안양 평촌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교실에 온 애완용이 아닌 흑돼지 한 마리. 선생님은 앞으로 100일 동안 아이들과 함께 돼지를 키우겠다고 한다. 왜 선생님은 '돼지 똥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빗발치는데도 교실에서 돼지를 키우자고 한 걸까? 그 답은 아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공부를 못하는 게 불효'라는 아이들. 교실 뒤편에 나붙은 아이들이 쓴 글 속에는 취업준비생들이나 쓸 법한 있는 언어들이 상당수다. '난 괜찮아, 난 할 수 있어',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난 괜찮아, 내가 한 말 중에 최고의 거짓말'이라는 문장이 있다. 벌써 대학 입시를 걱정하는, 미래 때문에 현재를 볼모 잡힌 아이들... 그러나 정작 수업 시간 아이들의 눈은 비어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도발한 결정은 그저 교실에 돼지 한 마리를 데리고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날부터 아이들이 달라졌다. 5학년이 됐다는 이유만으로 말수가 적어졌던 아이들은 아이 본연의 호기심, 수다스러움, 발랄함을 되찾았다. 그저 돼지 한 마리일 뿐인데? 그래서 이 2부작 다큐는 슬프다. 이제 겨우 12세인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을 돌면서 입시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교실에 찾아온 돼지 한 마리로 12세 본연의 아이다움을 되찾았다는 것이 특히 마음을 울렸다.

우리에서 꿀꿀거리기나 하고 더러운 줄 알았던 돼지가 운동장을 신나게 달리고 알고 보니 배변을 가리는 깔끔한, 그저 인간의 편의에 의해 더러워졌던 동물인 것처럼, 12세에 공부 기계가 된 아이들은 돼지와 함께 12세의 여름을 보내며 아이다운 밝음과 자신감, 책임감, 눈물을 찾았다. 이 세 달의 과정을 마친 아이들은 자아존중감 검사에서 6.26%의 상승세를 보였다. 고학년에 올라갈수록 과도한 학습에 치여 자존감이 하락세를 보인다는 우리 아이들. 겨우 돼지 한 마리가 혁혁한 성과를 보이는 이 교육 현장... 다큐는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고3도 사람이다... '우리 여기 있어요'


그래도 12세면 좀 낫다 싶다. 1, 2부 <교실에 온 돼지>에 이어 방영된 3부 <우리 여기 있어요>를 보면서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7.8, 6.5, 12.6, 7.7, 15.5... 이 숫자들은 중간고사를 3일 앞둔 고3학생들의 가방 무게다. 평균 6.5kg. 우리나라 고3학생들은 1.5 리터 생수병 4개 반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가방 무게에 놀랄 것도 없다. 구리 여고 이한울 외 3명의 학생들이 만든 영상 속 고 3학생들이 이야기하는 교우, 진로, 미래, 대학, 공부, 성적 등등에 대한 또래 학생들의 이야기는, 그 가방보다 훨씬 무거운 삶이 이들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준다.

대다수의 고3 아이들은 무기력함에 지배당한다. 자신들은 미래를 저당 잡힌 상태고 지금은 그저 견뎌야할 인고의 시간이라 입을 모은다. 많은 고3들이 자소서(자기소개서)라 쓰고, 대학에 맞춰 자기를 각색하는 '자소설'을 쓰며, 자존감 상실을 경험한다. 심지어, 경쟁만 남은 교실에서 자신보다 못한 타인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자신들이 '변태'같다고 항변한다.

이제 곧 대학에 들어가 자신의 꿈을 펼쳐야 하는 아이들은 마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살다보니, '자신이 딱히 잘하는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아니 지난 19년의 세월 동안 잘 하는 걸 찾을 기회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이게 입시 교육의 정점에 선 고 3의 현주소라 다큐는 말한다.

고3이 아니라면 다를까. 다큐에 나온 여수 여중 2학년 학생은 '열심 증후군'에 빠져 있었다. 개인 블로그에 매일 매일 공부한 것을 기록하는 아이들. 공부를 하다 몸이 망가지면, 이렇게라도 해서 열심히 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 안심하는 애처로운 모습까지. 더 심각한 건 이제 중2밖에 안 된 학생이 '넌 이것밖에 안 되는 얘야?'라는 말을 들을까봐,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본심을 알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차마 들키고 싶지 않은 절대 고독. 다큐는 우리 청소년들의 '번아웃'을 그렇게 증명한다.

준비되지 않은 채 교육 현장으로 간 선생님들


초등 교육에서 고등 교육으로, 우리 교육 곳곳에 침투한 '번아웃 현장'을 절절하게 그려나간 다큐는 4부에 이르러 뜬금없이 교대 학생들을 보여준다. 도대체 미래의 선생님들과 번아웃이 무슨 상관일까?

갓 초등학교에 부임한 교사 조영우는 첫날부터 대학에선 전혀 배운 적 없는 상황에 놓여 정신 줄을 놓게 생겼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이미 지쳐버린 조영우 교사는 스트레스로 음식을 넘기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저 '신입이라서'라는 핑계로는 막막해 보이는 상황. '도대체 그의 지난 4년이 어땠기에'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 지켜본 교대 학생들의 생활은 빡빡하다. 혼자서 전 과목을 책임져야 하는 초등교사의 특성 때문에, 미래에 교사가 될 이들의 일과는 빠듯하다. 근데, 이렇게 수업을 많이 받는데도 왜 현장에 가면 그렇게 당황하는 걸까?

현재 교대 수업은 기능적 교육 내용에 치우쳐 있다. 4년제 사범대 교육 과정을 벤치마킹한 현재의 교대 교육 과정은 학생들에게는 '현실과 너무 멀다'란 평가를 받는다. 현장에서 선생님이 맞닥뜨리게 되는 건, 20여명이 넘는 학생들만큼이나 다양한 상황이다. 그러나 정작 아동 심리라든지 현실 교육 과정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은 교과 수업 전달에 밀려 형식적인 수업이 되고 만다.

교육 현장에 어떻게 적응할지 준비할 틈도 없이 교과 과정만을 기계적으로 익히고, 거기에 다시 암기식 학습으로 임용 고시를 통과한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 선다. 당연히 학생들과 만날 상황이 아니다. 다큐에 등장한 한 교사는 묻는다. 입시 교육에만 시달리다 자신을 잃어가는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의 현실과 아랑곳없이 교과 과목만 배우고 현장에 선 선생님들. 과연 준비 없이 교육 현장에 투입된 선생님으로 인한 시행착오는 누구의 몫이 되는 것이냐고.

동심을 잃은 채 입시 교육으로 내몰린 초등학생들, 그리고 그런 교육을 10여년 받다 보니 자신을 잃다 못해 무기력해져버린 고등학생들, 그리고 그저 교과 내용만 달달 외우는 임용 고시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교육 현장에 서게 되는 선생님들. 학생들은 '번아웃'이 될 정도로 공부를 하지만, 정작 그 교육 때문에 '자신'을 잃는다. 과연, 현재 우리 교육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다큐는 묻는다. '교육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