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태용호가 초반부터 휘청이고 있다. 1년 남짓한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 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대회 준비에 힘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팀분위기를 흔드는 악재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최종예선에서의 부진한 경기력에 대한 실망감, 축구협회에 대한 대중의 불신, 여기에 '히딩크 복귀설'이 불러온 광풍까지 겹쳐, 신태용호는 불과 출범 2개월여 만에 대중의 외면을 받으며 '레임덕'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렸다.

축구협회는 이미 신태용 감독 체제로 월드컵 본선까지 함께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신 감독은 10월 유럽원정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본선 대비 체제에 돌입한다. 월드컵에서는 지난 최종예선에서 다 보여주지 못한 '신태용식 공격축구'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찬 비전을 약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표팀을 바라보는 여론의 분위기는 여전히 싸늘하다. 오히려 팬들의 관심은 현재의 신태용호보다도 히딩크 전 감독의 복귀설에 더 쏠려있다. 히딩크 감독이 지난 14일 네덜란드 현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축구를 위하여 어떤 식으로든 기여할 용의가 있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면서 국내 여론은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축구협회는 "히딩크 감독의 조언을 언제든 받아들이겠다"며 수습에 나섰지만 많은 팬들은 그 정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히딩크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재영입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졸지에 축구협회와 히딩크 사이에 낀 새우 신세가 되어버린 신태용 감독으로서는 난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축구협회와 신태용 감독의 뼈아픈 실책들

사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축구협회와 신태용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다. 축구협회는 그동안 히딩크 감독과의 사전접촉설을 강하게 부인해왔으나, 히딩크 재단 측에서 김호곤 기술위원장에게 보낸 메시지와 히딩크 감독의 현지 인터뷰가 뒤늦게 공개되면서 '거짓말' 논란에 휩싸였다. 특히 히딩크 측의 제안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언론에서는 말을 바꾼 김호곤 기술위원장의 행태를 두고 여론의 뭇매가 쏟아지고 있다.

축구협회가 팬들의 신뢰를 잃은 것은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협회는 최근 전현직 임직원들의 업무상 배임 혐의가 단체로 드러나 형사 입건되며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협회의 위상과 신뢰도에 치명타를 안긴 중대한 사건임에도, 정몽규 회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진의 공식사과나 책임론에 대한 언급없이 홈페이지에 졸속으로 올린 '사과문' 하나로 적당히 넘어가려했던 무책임한 태도 역시 많은 팬들의 공분을 자아낸 바 있다.

대표팀 운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협회는 지난 수년간 대표팀 감독을 두고 '졸속 선임' 논란에 휘말렸다. 홍명보나 울리 슈틸리케같이 감독 경력이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인물들을 무리하게 기용하거나, 클럽팀에 전념하던 최강희 감독을 시한부 감독으로 빼내오는 등 '파행'의 연속이었다. 대표팀 경쟁력 강화를 위한 뚜렷한 비전이나 목표의식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연령대별 대표팀에서부터 여러 차례 '돌려막기'로 투입해 오던 신태용 감독을 다시  A대표팀 사령탑으로 기용하면서 일단 급한불을 껐다. 하지만 팬들의 마음까지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팬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축구협회의 행정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면서, 기존 협회 인사들이 선택한 신태용호 역시 덩달아 졸속 선임 논란에 휘말리며 '정통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설상가상 경기력이라도 좋았다면 부정적인 여론을 진정시킬 수 있었겠지만, 신태용호가 최종예선에서 보여준 답답한 모습은 오히려 팬들의 불신만 더 자극했다. 신태용호는 이란-우즈베크전에서 전반적으로 부진한 경기운영을 보이며 2연속 무승부에 그쳤음에도 경쟁팀들의 혼전에 힘입어 월드컵 본선진출이 가능한 조 2위를 간신히 사수할 수 있었다. 사실상 자력으로 진출한 게 아니라 '강제로 본선진출을 당했다'는 자조적인 평가까지 나올 정도였다. 

여기에 헹가래 논란이나 주장 김영권의 실언, 팬들의 '졸전' 비판에 신태용 감독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반응을 보이는 등, 여론과는 너무나는 동떨어진 대표팀의 잇단 '헛발질'도 팬들이 등을 돌리는데 한몫을 담당했다. 많은 팬들은 이대로라면 '내년 월드컵 본선에서 신태용호는 희망이 없다'는 비관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때마침 등장한 히딩크 복귀설은 '한국축구를 응원할 명분'을 잃어버린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기 충분했다. 세월이 흘렀지만 히딩크 감독은 여전히 2002년 한일월드컵의 영웅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는 신화적인 존재다. 이런 히딩크 감독이 먼저 한국 복귀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돈이나 조건에 연연하지 않고 한국축구를 돕겠다고 나섰으니 팬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히딩크 복귀설의 현실성 따져봐야

하지만 축구협회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시점에서 일부 팬들이 주장하는 '신태용을 내치고 히딩크를 감독으로 영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과연 얼마나 합리적인 대안인지는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히딩크 복귀설의 현실성이다. 히딩크 측의 입장에 따르면 축구협회에 대표팀 감독 복귀에 대한 의사를 타진한 것이 6월 중순 경이었고 당시 대표팀은 슈틸리케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막 경질된 시점이었다. 대표팀은 본선진출이 아직 불투명한 이란-우즈베키스탄과의 최종예선 2경기만을 남겨놓으며 누가 신임감독이 되든 엄청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외국인 감독을 데려와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하기보다는, 일단 최근의 한국축구를 잘 파악하고 있고 단기간에 리스크를 최소화할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그 시점에서 신태용 감독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서는 충분히 현실적인 판단에 가까웠다.

더구나 히딩크 측 관계자의 제안에 따르면 처음부터 "최종예선까지는 임시 감독으로 치르고, 본선을 통과하면 그때 히딩크 감독의 영입을 고려하라."는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무리 히딩크 감독이라고 해도 이는 처음부터 한국축구가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되는 조건이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국내 감독을 '총알받이'로만 이용하고, 본선은 유명한 해외 감독에게 맡긴다고 했다면, 과연 누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한국축구를 위하여 임시 감독으로 나서려고 했을까. 중요한 단두대 매치를 앞두고 그런 시한부 감독 밑에서 대표팀의 집중력과 기강을 제대로 세울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김호곤 위원장과 축구협회의 '자살골'이 아니었더라도, 당시 히딩크 감독의 영입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둘째로, 히딩크를 데려오기 위하여 과연 지금 '신태용 감독을 경질해야 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신 감독은 분명히 지난 최종예선 2연전을 거치면서 지도자로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고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 하지만 자력이든 운이든 간에, 신태용은 어쨌든 한국축구의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이라는 임무를 완수해냈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지는 아직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완전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른 시점이다.

무엇보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시한폭탄같은 대표팀을 맡아 고생한 감독을 이제와서 내치라는 주장은, 명백한 '토사구팽'이자 물에 빠진 사람 건져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다. 그동안 대표팀이 흔들리게된 근본적인 원인은 협회와 역대 감독들이 '합리적인 절차와 원칙'의 중요성을 우습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부 팬들이 앞장서서 해외 명장을 데려오기 위하여 버젓이 임기와 계약기간이 보장된 대표팀 감독을 명분도 없이 내치라는 요구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이는 한국축구를 더욱 막장드라마로 몰아넣자는 궤변일 뿐이다.

'히딩크 신드롬'의 반작용이라고는 해도 일부 팬들의 신태용 감독에 대한 폄하와 무시는 도를 지나치고 있다. 신태용 감독은 물론이고, 히딩크 복귀설을 조금이라도 부정적으로 보거나 반대하는 의견들은 마치 축협의 지지자나 하수인처럼 매도당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발상이 포퓰리즘에 의한 마녀사냥의 전형적인 사례다.

신태용 역시 현역 시절 한국축구의 레전드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우승, 각급 연령대별 대표팀 등을 통하여 지도자로서도 충분히 검증된 인물이다. 해외의 세계적인 명장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한국 대표팀 감독을 맡기에 절대 부족하지 않은 커리어였다. 

홍명보나 슈틸리케처럼 지도자로서 경력이 불확실한데도 어느날 A대표팀에 갑자기 등장한 '낙하산 감독'들과도 애초에 차원이 달랐다. 신태용은 축구계 비주류 출신으로 선수와 지도자를 거쳐 차근차근 '실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단지 몇 경기만으로 '축구인 신태용'의 모든 것을 함부로 재단할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극히 오만한 발상이다.

축구협회 개혁과 신태용호 흔들기는 별개다

마지막으로 맹목적인 '히딩크 판타지'에 대한 허상이다. 히딩크 감독이 돌아오더라도 2002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기 어렵다는 것은 본인도 인정한 대목이다. 시대가 달라졌고 히딩크 감독도, 한국축구의 환경도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히딩크 복귀를 주장하는 이들의 명분이란 여전히 '2002년의 향수'나 '축구협회에 대한 분노의 여론'에만 막연히 기대고 있을뿐, 이성적이고 설득력있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히딩크 감독의 최근 경력이나 대표팀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없이 '아몰랑, 히딩크만 데려오면 어떻게든 달라지겠지'하는 생각은 순진한 환상에 불과하다.

히딩크 효과를 신봉하는 팬들의 기대치를 종합해 보면 결국 '한국축구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정도 눈높이라면 히딩크에게 고작 1년짜리 본선용 대표팀 감독보다는, 오히려 기술위원장이나 축구협회장을 맡기자고 하는게 차라리 더 현실적이다.

현재 한국축구가 초래한 위기의 구조적인 원인은 행정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대표팀 감독 한 명만 바뀐다고 단기간에 해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축구협회의 개혁 방향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발전적인 담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그저 히딩크라는 구세주에게만 기대어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철지난 영웅주의 판타지일 뿐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히딩크 감독의 복귀에 대한 소모적인 논란이 아니라, 축구협회와 대표팀을 어떻게 개선해나갈 것인가 하는 건설적인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사태가 길어질수록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바로 '우리 대표팀'이다. 자국 팬들이 앞장서서 대표팀 감독을 무시하고 흔드는 상황에서 감독의 리더십과 권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감독이 계속 여론의 눈치를 보면서 끌려다니게 되면 소신있는 대표팀 운영은 불가능하다. '축구협회에 대한 지속적인 개혁 요구'와 히딩크를 빙자한 '신태용호 흔들기'는 이제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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