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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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에서 부터 홍상수 영화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홍상수 남자의 탈을 쓴 춘수(정재영 분)는 홍상수 남자들이 늘 그랬듯이 우연히 길에서 만난 여성 희정(김민희 분)에게 치근덕거리고, 춘수의 적극적인 구애에 마음을 조금씩 여는가했던 희정은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여기까지는 홍상수 영화에서 늘 보았던 장면이다. 2부로 넘어가는 순간 앞에서 벌어진 비슷한 상황들이 이어지는데, 희정을 대하는 춘수의 태도가 좀 다르게 보인다. 어떻게든 희정을 꼬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1부의 춘수와 달리, 2부의 춘수는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이 유부남임을 솔직히 밝히고 희정을 대하고자 한다. 그랬더니 1부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판이한 결말로 나아간다. 본질적인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절망감만 도출해냈던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희망적으로 비춰지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서서히 흐르기 시작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후 발표한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은 홍상수 영화에서는 난생 처음으로 완벽하고 낯 뜨거운 해피엔딩을 보여주기 까지 했다. 이와는 다르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김민희 분)는 여전히 외롭고 힘든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하지만, 마지못해 일어나는 것 같았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과 달리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영희의 발걸음은 한결 가볍고 당당하다.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없지만... 변화의 조짐들 다시 <그 후>로 돌아와, 김민희가 맡은 아름은 봉완이 운영하는 출판사 첫 근무 날, 아름을 봉완의 외도녀로 착각한 봉완의 아내에게 봉변을 당하고 갑자기 돌아온 창숙 때문에 단 하루 만에 일자리를 잃게 되는 엄청난 시련을 맞게 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봉완과 창숙은 아름을 봉완의 아내가 의심하는 불륜녀로 몰고 가 자신들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한다. 참으로 한심하고 짜증스러운 상황이 절정으로 치닫을 즈음, 봉완의 출판사가 낸 책들을 잔뜩 들고 택시를 탄 아름으로 전환한 홍상수의 카메라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해 낸다.
홍상수 영화 중 이례적으로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아름의 얼굴은 방금 온갖 고초에 시달린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밝다. 단순히 아무 생각 없어 해맑아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아름은 방금 자신이 당한 시련을 모두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자신의 불행한 현실을 긍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봉완의 출판사를 찾은 아름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봉완에게 먼저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의 안부를 건넨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난 날 있었던 안 좋은 일들을 덤덤하게 털어놓는 봉완과 창숙은 한결 편안해 보이며,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아름의 믿음처럼 진짜 괜찮아 보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 <그 후>까지 홍상수의 영화의 인물들은 늘 괜찮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불운과 마주한 주인공들은 현실을 애써 부정하거나 마지못해 살아가는 체념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는 언제나 개운치 않은 씁쓸한 뒷맛을 선사한다. 좌절, 절망, 체념은 염세적 세계관으로 똘똘 뭉친 홍상수 영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요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홍상수 영화가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부터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