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과 플라티니
유벤투스 공식 페이스북
명장을 데려왔으니 그에 걸맞은 전사들도 있어야 하는 법. 지금도 짱짱한 스쿼드를 자랑하지만 1980년대 트라파토니와 함께 왕조 구축을 이룬 유벤투스 스쿼드의 면면은 역대급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었다.
우선 1982 스페인 월드컵서 주가를 드높인 파올로 로시, 미셸 플라티니, 즈비그니에프 보니엑이라는 가공할 만한 공격 조합으로 창끝을 다듬었다. 이들을 든든히 보좌한 마르코 타르델리와 마시보 보니니도 빼놓을 수 없는 보석이었다. 이뿐만 아니다. 1970년대 수비 레전드 클라우디오 젠틸레의 잔상을 지운 시레아-파브레오 센터백 콤비 역시 비안코네리의 든든한 방패막이였다.
최고의 명장과 이를 따르는 용맹스런 전사들을 앞세운 유벤투스는 본격적으로 왕조 구축을 이루기 시작한다. 트라파토니의 유벤투스는 1977~1978 세리에A 2연패를 달성하며 산뜻하게 출발했다. 비록 유러피언컵 우승은 하지 못했지만 1977년, 아틀레틱 빌바오를 꺾고 UEFA컵 우승을 달성해 이탈리아를 넘어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더해 1984년, 포르투갈 강호 FC 포르투를 상대로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루며 우물 밖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최악의 결승전- 헤이젤 참사UEFA컵, 컵위너스컵까지 석권하며 예열을 마친 유벤투스는 1984-1985시즌 들어 유러피언컵 정복을 시작한다. 2년 전 결승전서 마가트가 이끄는 함부르크에 아쉽게 패해 목전에서 빅이어를 놓친 터라 더욱 독기 품고 대회에 임했다. 비안코네리 군단은 핀란드 클럽 라이브를 시작으로 그라스호퍼, 스파르타 프라하, 보르도를 차례로 격파하고 결승전에 올랐다.
4경기에서 총 18득점이라는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자랑했는데, 공격수 뺨치는 득점력을 갖고 있던 미드필더 플라티니(7골)와 토종 공격수 로시(5골)가 연일 화력을 뿜었다. 더욱 놀라운 건 보르도와의 4강 2차전 패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유벤투스의 유러피언컵 우승 의지는 대단했다.
결승전 파트너는 '붉은 제국' 리버풀이었다. 당시 리버풀은 전 시즌 AS 로마를 꺾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해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유벤투스를 맞이했다. 막강한 전력을 갖춘 리버풀이었으나 유벤투스의 기세도 만만찮았다. 이미 1984년 유러피언 슈퍼컵서 '아름다운 밤' 보니엑의 활약에 힘입어 한 차례 레즈를 꺽은 바 있어 자신감이 넘쳤다.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두 팀이 결승 길목에서 만났으니 최고의 명승부가 펼쳐진 걸로 예상했으나, 안타깝게도 비극적인 참사가 그들을 기다렸다. 바로 헤이젤 참사다. 경기 시작 전부터 양 팀 팬들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리버풀 훌리건들의 위협에 겁을 먹은 유벤투스 팬들이 출구로 도망치다 무려 39명이 압사를 당하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대참사로 인해 경기는 1시간 정도 지연됐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경기를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석연치 않은 판정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경기 시작 후 유벤투스는 리버풀 미드필더 로니 웰란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허용하지만 타코니의 선방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후 후반 11분 페널티 박스로 쇄도하는 보니엑이 상대 수비수에게 넘어지며 페널티킥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엑이 파울을 당한 지점이 페널티박스 밖이어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