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K리그에서 4골 1도움을 기록한 공격수가 있다. 전체 득점 순위는 고작 52위다. 경기당 득점률로는 0.13골에 불과하다. 한 팀의 주전 공격수로서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성적이다. 그런데 또 어떤 공격수는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A매치 15경기만에 5골을 뽑아냈다. 전자에 비해 출장경기수는 정확히 절반에 불과하지만 득점은 오히려 1골이 더 많다. 경기당 득점률은 0.33골로 거의 3배에 이른다. 진정 놀라운 것은 두 선수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독특한 기록의 주인공은 바로 이정협(울산)이다. 냉정히 말해 K리그에서는 평범한 공격수지만 유독 가슴에 '태극마크'만 달면 이정협은 전혀 다른 선수가 된다. 11일 천안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캐나다와의 평가전에서도 최전방 공격수로 선발 출전한 이정협은 전반 25분 강력한 오른발 슈팅으로 한국의 두 번째 골을 만들어냈다. 이정협의 A매치 5번째 골이기도 했다. 이 골로 승기를 잡은 한국은 캐나다에 2-0으로 완승했다.

이정협은 자타공인 슈틸리케호의 황태자로 꼽힌다. 이정협은 상주 상무 시절이던 2014년 겨울 전지훈련을 통해 처음 슈틸리케 감독의 눈에 들었다. 이정협은 당시 K리그에서도 골수 마니아 팬들이나 겨우 알 정도로 철저한 무명에 가까웠던 선수였다. 당시 2부리그 챌린지에 속해있는 상주에서도 이정협은 주전이 아니었고 소속팀에서 특출한 활약을 펼친 것도 아니었다. A대표팀에 오기전까지는 청소년 대표팀 경력조차 없었다. 2014년 8월 한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갓 취임하며 한국축구에 대한 정보가 많지않던 슈틸리케 감독이 오로지 자신의 안목과 소신으로 발굴해낸 첫 선수가 바로 이정협이었다.

이정협은 태극마크를 달고 자신의 첫 메이저대회였던 아시안컵에서 자신의 진가를 증명해보였다. 출전기회를 잡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보기좋게 뒤집고 주전 공격수로 중용되며 한국을 대회 결승까지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득점은 2골에 그쳤지만 조별리그 선두를 확정지은 호주전, 이라크와의 4강전 결승골로 영양가는 만점이었다. 특히 공격수임에도 부지런한 활동량과 수비가담, 연계플레이로 동료들을 살려주는 이타적인 플레이는 슈틸리케 감독이 추구하는 전술에도 가장 부합하는 유형의 공격수였다.

돌이켜보면 이정협에게는 기적같은 행운의 연속이었다. 만일 이정협이 슈틸리케 감독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주전 공격수로 꼽히던 이동국과 김신욱이 아시안컵을 앞두고 하필 동반 부상에 시달리지 않았더라면? 이정협이 A매치 데뷔전이었던 2015년 사우디와의 평가전에서 골을 넣지못했더라면? 이중 단 하나만 어긋났어도 이정협의 동화같은 스토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이정협은 '군데렐라'라는 별명을 얻으며 슈틸리케 축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정협을 과감하게 발탁하여 대성공을 거둔 슈틸리케 감독의 안목은 '갓틸리케'로 칭송받았다.

당시 팬들이 유독 이정협과 슈틸리케 신드롬에 열광한데는 불과 몇 달전 브라질월드컵 참사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했다. 홍명보 전 감독은 '의리축구' 논란에서 드러나듯 박주영처럼 인지도는 높았지만 기량과 열정이 쇠락한 몇몇 해외파와 스타 선수들의 이름값에만 집착하고 K리거들을 경시하다가 역대 최악의 월드컵 참사를 초래했다. 이름값-인맥-선입견 등 한국축구의 구태에서 모두 자유로웠던 이정협의 발탁과 성공은 슈틸리케 감독이 외국인 감독이라서 가능했던 신의 한 수였다.

하지만 이정협은 지난 3월을 끝으로 한동안 대표팀에서 멀어졌다. 이미 지난해 8월 경기중  당한 안면 골절 부상으로 한동안 주춤했고, 올해는 울산으로 임대이적하며 K리그 클래식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소속팀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들을 중용하겠다던 원칙을 내세운 슈틸리케 감독으로서도 이정협을 한동안 배제할 수밖에 없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10월 캐나다-우즈벡과의 2연전에서 이정협을 오랜만에 다시 호출했다. 최종예선 이후로는 첫 발탁이다. 특히 우즈벡전은 한국축구의 월드컵 본선행과 슈틸리케 감독의 거취를 가늠할 단두대 매치로까지 평가받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대표팀 감독으로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자신이 발굴해낸 가장 최고의 히트상품인 이정협 카드를 다시 꺼내드는 승부수를 던졌다.

엄밀히 말해 이번에도 이정협은 소속팀 성적으로만 따지면 대표팀에 올만한 자격을 보여줬다고 할수 없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의 이정협에 대한 신뢰는 각별하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며 이정협을 자신이 추구하는 축구의 '플랜 A'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정도다.

어차피 슈틸리케 감독이 공격수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단순히 '골잡이'로서의 능력보다는 최전방에서 2선과의 다앙한 연계를 통한 전술수행능력이다. 중앙에서 좌우로 폭넓게 움직이며 수비를 흔들고 침투하는 동료에게 공간을 만들어 주고 수비시에는 최전방에서부터 강하게 압박하는 1차 수비수의 역할까지 소화한다.

더구나 이정협은 A매치 15경기 5골이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대표팀에서의 이정협은 골잡이로서의 성과도 나쁘지 않다. 슈틸리케호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이정협보다 많은 득점을 올린 선수는 없다. 석현준이 4골, 지동원이 2골(A매치 총 10골)에 그쳤다. 슈틸리케호 최다득점자는 2선 공격수로 주로 활약하는 손흥민으로 10골(A매치 총 16골)을 기록중이다.

이정협의 득점 기록이 아시아권 팀과의 경기에 치우쳤다고 하지만, 이는 최근 3년간 한국의 A매치가 주로 아시아권 경기 위주라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고, 오히려 이정협이 득점을 올린 호주-이라크-사우디-레바논 등은 적어도 아시아에서는 그리 만만한 팀들이 아니다.  호주는 AFC에 편입되어었지만 사실상 유럽팀이나 마찬가지다. 이정협이 처음으로 비아시아권팀과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린 캐나다는 피파랭킹 110위의 약체지만 한국이 이날 경기전까지 역대 전적에서 열세였을만큼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단지 논리나 우연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슈틸리케호와 이정협만의 찰떡궁합이다.

이정협이 올린 5골중 3골이 결승골일 만큼 득점의 순도도 높았다. 이정협은 슈틸리케 감독이 요구하는 전술적 역할에 충실히 부응하면서 필요할때는 해결사의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그야말로 슈틸리케호에 최적화된 공격수라고 할만하다. 최근 이란전 패배 이후 "카타르의 세바스티안 소리아같은 공격수가 없어서 졌다."는 실언으로 뭇매를 맞았던 슈틸리케 감독에게는 이정협이야말로 한국의 소리아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소속팀에서는 활약하면서 정작 대표팀에만 오면 부진한 선수들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소속팀에서는 그저 그렇거나 부진할때도 유독 대표팀에서는 펄펄 나는 선수들이 있다. 루카스 포돌스키(독일, 갈라타라사이)나 니클라스 벤트너(덴마크, 노팅엄 포레스트), 에두아르도 바르가스(칠레, 호펜하임)같은 선수들이 대표적이다. 멀리 볼 것 없이 한국축구에서는 지금은 방송인으로 더 친숙한 안정환이 월드컵을 위하여 소속팀과 리그까지 옮겼을 만큼 대표팀에서 유독 더 빛난 'Mr, National Team'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정협이 진정한 '국대의 사나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평가전에 불과한 캐나다전보다는 우즈벡전에서의 활약이 훨씬 중요하다. 작년 아시안컵에서 슈틸리케 감독이 무명의 이정협을 신데렐라도 만들었다면 이제는 이정협이 벼랑 끝에 몰린 슈틸리케 감독을 구원해야할 구세주가 되어야하는 입장이다. 또한 슈틸리케 감독이 아니라면 이정협이 꾸준히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우즈벡전이 슈틸리케 감독은 물론 이정협의 향후 국가대표 커리어까지 좌우할수도 있는 중대한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일종의 운명공동체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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