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화, 홍련> 포스터영화사 봄
영화 <장화, 홍련>에서 대부분의 평자들이 은근슬쩍 넘어간 문제가 있다. 그것은 실제 귀신의 존재 여부이다. 적지 않은 평론이나 비평이 영화 제목에 사로잡혀 고전소설과의 연결점을 찾는데, 그것이야말로 감독의 귀신놀이에 홀려 진실을 못 보는 독법이다. 귀신의 객관적 존재 여부는 이 영화를 제대로 해석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영화를 재밌게 보기 위해서 독자는 최대한 능동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고 생각한다. 비록 영화라는 완성품은 감독의 손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만드는 최종 작업은 감상자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독자가 최대한 영화를 완전무결하게 독해할수록 영화는 더욱 좋은 작품으로 거듭난다. 감독의 역량과 무관하게 말이다. <장화, 홍련> 또한 감독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최대한 완전무결하게 작품을 읽는 것이 작품 자체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영화에는 두 가지 반전이 있는데, 하나는 동생 수연이 이미 죽은 인물이고 따라서 영화 속 수연은 언니 수미의 환상이라는 점. 나머지 하나는 새엄마 은주 또한 수미의 심리 속 역할놀이였다는 점이다. 영화의 핵심은 수미가 끔찍한 사건을 겪은 후 해리성 장애에 걸려, 혼자서 1인3역(정확히는 1인2역이지만)의 장화홍련전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롤플레잉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지점이 세 군데 있다. 첫째는 동생 수연이 본 귀신의 정체. 둘째는 새외숙모 미희가 본 싱크대 밑 여자아이의 정체. 셋째는 마지막에 새엄마 은주가 옷장 속에서 본 귀신의 정체이다.
수미의 정신병적 롤플레이는 영화 해석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수미의 병에 대해서는 감독이 영화 마지막 20분 동안 지나치게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럼에도 끝내 영화가 함구하는 지점, 수미의 정신병으로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 그것은 바로 그 집에 실제로 귀신이 있나 하는 점이며, 그 부분이 명확히 설명되어야 비로소 영화에 대한 독법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법 1] 귀신이 있다
우선 실제로 귀신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발작 도중 미희가 본 귀신은 수연일 것이고, 마지막에 은주가 본 귀신은 수미(와 수연)의 친엄마일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은 영화 초반에 동생 수연이 본 귀신이다. 왜냐하면 이때는 이미 실제 수연이 죽은 이후의 시점으로, 수연은 수미의 환상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수미의 환상 속 수연이 실제로 귀신을 본다는 것은 영 껄끄러운 해석이다. 따라서 이 장면만큼은 실제 귀신이 아닌 수미의 의식이 2차적으로 만들어낸(1차적으로는 수연을 가공했으니) 간접적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수미가 자신의 심층에 만들어낸 가상의 수연이 다시 귀신을 본다는 것은, 수미가 생각했을 때 수연이 엄마의 죽음에 원한과 슬픔이 클 것이라는 판단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또는 수미 자신이 가진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을 수연을 통해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아마, 그 대상은 귀신이 아니라 가상의 은주라고 해석하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수미는 은주를, 수연을 괴롭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시각적인 측면에서도 영화에서 수연의 방문을 거머쥔 손은 은주의 손을 가장 닮았다.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귀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해석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귀신이 존재한다면 왜 그들은 수미와 은주의 눈에만 보이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장화홍련전처럼 원한에 가득 찬 귀신(친엄마와 수연 모두)이라면, 가장 먼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존재는 남편/아빠인 무현일 것이다. 하지만 무현은 귀신을 보기는커녕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은주의 동생인 선규 부부 중 유독 부인인 미희만 귀신을 봤다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오히려 미희보다, 은주의 동생인 선규가 귀신을 보고 기겁하는 것이 원귀들의 바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해석이 맞다면, 이 영화는 장화홍련전의 시대착오적인 동어반복으로 전락하고 만다. 장화홍련전은 그 시대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귀소설이겠지만, 현재의 눈으로 보면 가부장적인 사회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작품에 불과하다. 장화홍련전에서 장화와 홍련이 자살하는 이유는 처녀성을 잃었다는 모함 때문이다. 진실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제가 살인범이다.
그 속에서 장화와 홍련 그리고 새엄마는 모두 피해자이다. 새엄마는 자신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인하며, 그것을 빌미로 의붓자식들을 죽게 만드는 가련한 캐릭터이다. 만약 현재 시점에서 동일한 사건이 발생해 죽은 아이들의 귀신이 나타난다면, 새엄마뿐만 아니라 친아빠에게도 강력한 원망을 품을 것이다. 특히 <장화, 홍련>에서 무현은 사실상 모든 사건의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죄를 피해갈 수 없다.
[독법 2] 귀신은 없다
따라서 집에 귀신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낫다. 그렇다면 처음에 수연이 본 귀신은 귀신이 아니라 수미의 심리 속에서 수연을 괴롭힐 거라는 은주의 이미지일 것이다. 미희가 본 싱크대 밑 귀신은 미희의 공포와 죄책감의 반영일 것이다. 친엄마와 수연이 죽은 날 선규 부부는 그 집에 있었기 때문이다. 은주가 본 장롱 속 귀신 또한 은주의 두려움과 죄의식이 만든 이미지일 것이다(이후에 은주 또한 수미처럼 정신병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읽으면 <장화, 홍련>은 죄의식과 관련한 영화가 된다. 친엄마와 수연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죄의식을 느끼는 자들(수미, 은주, 미희)은 모두 귀신을 보고,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않는) 자들(무현, 선규)은 귀신을 감지하지 못한다(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영화 해석의 끝이라면, 몇몇 평자들의 말마따나,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담은 작품이 아니라 정신병 또는 정신분석의 한 사례에 그치고 말 것이다. 혹은, 무리하게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죄는 짓더라도 죄의식은 짓지 말라, 정도가 되고 만다.
나는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야 작품의 제대로 된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수미를 정신병자로 규정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오히려 수미의 심리는 지극히 정상이다.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기 위해 수미는 해리성 인격 장애에 걸린다. 그것은 수미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이며, 반대로 말하면 그런 방어기제를 나타내는 것은 정상적인 행위이고, 오히려 수미의 정신이 건강하다는 방증이다. 하지만, 아내와 딸을 죽음으로 몰고, 남은 딸마저 정신병에 걸리게 만든 무현이 멀쩡하다는 점이야말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끔찍한 사건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태연하게 살아가는 무현이야말로 정신이 망가진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이 지점에서 <장화, 홍련>은 죄의식에 대한 영화에서 개인의 내면화에 관한 영화로 확장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자체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개인적으로 수미의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라고 생각한다. 추가로 엘렉트라 콤플렉스 또한 프로이트의 가부장적 관념의 산물이라는 입장 또한 중요치 않다). 그것이 엘렉트라 콤플렉스든 무엇이든, 한 개인의 욕망이 존재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수미는, 자신의 욕망을 사회가 결코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스스로 그 욕망을 자기 검열한다.
은주와 미희가 귀신을 본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회의 객관적인 질책 때문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 향할 것으로 짐작되는 마음 속 감시자의 시선을 내면화하였기 때문에 귀신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한 번 감수성의 영역으로 논의의 외연을 확장한다. 감독은 아마도 감수성을 여성의 영역으로 본 듯하다. 그래서 감수성을 가진 여성들은 외부의 시선을 쉽사리 내면화하여 귀신을 보지만, 감수성이 없는 남성들은 그러지 못한다. 수미의 해리성 장애 또한 타인의 관점을 내면화한다는 점에서 감수성의 과잉이 빚어낸 증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개인의 욕망을 억압하고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사회 체제와 구조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더 나아가 그 내면화로 인한 병증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시키는 것이야말로 더 큰 문제이다. 우리 사회는 일관된 정체성을 정상성의 영역으로 둔다. 반대로 다중인격이나 기억상실증 등 일관적이지 않은 정체성을 비정상성의 범위에 위치시킨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 보면, 일관된 정체성이란 타인의 시선을 나의 심리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완고함의 반영일 수도 있다. 반면 다중인격은 외부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유연함으로 읽을 여지가 생긴다.
여전히 이성적 질서를 우위에 두고, 감성적 혼란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여 외부로 밀어내는 우리 사회가 여전히 관용이 부족하다는 것이 영화로부터 얻을 수 있는 메시지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끔찍한 사회는 없다. 죄를 짓고도 일말의 죄의식 없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세상 모든 무현들의 사회와, 피해자임에도 죄의식을 사회적으로 승인 받지 못해 정신병원에 쳐박히게 된 세상 모든 수미들의 병원. 그 두 공간이 소통하지 못하는 한, 사회는 더 어두워질지 모른다.
마치 영화 속 '그 집'의 분열처럼. 제목 장화와 홍련 사이에 찍힌 쉼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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