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룸>의 주연 브리 라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 <룸>의 주연 브리 라슨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 콘텐츠게이트


* 이 기사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룸>의 동명 원작소설은 오스트리아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 범죄물이나 스릴러에 어울릴 것 같은 소재죠. 그러나 원작자이면서 시나리오까지 각색한 작가 엠마 도노휴는 이 사건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성장 이야기의 패턴을 건져 올립니다. 비극적으로 탄생한 아이 잭의 관점에서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요.

태어난 후 다섯 살 생일이 지날 때까지 줄곧 작은 방에서만 살았던 잭에겐 엄마가 세상의 전부입니다. 이따금 '보급품'을 가져오는 올드 닉이 있긴 하지만요. 어쨌든 잭은 이 세계에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엄마와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방 밖에도 실재하는 세상이 있다니, 잭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래도 그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로 나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TV로만 보던 일들을 실제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지요.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다

이 특별한 상황에 놓인 어린아이의 이야기가 울림을 갖는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성장의 과정을 경험하기 때문일 겁니다. 처음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안주하려 합니다. 그래서 변화를 거부하죠. 하지만 내재된 문제가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은 점점 커집니다. 결국에는 자의든 타의든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거기에 맞게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일반적인 성장담과 달리 드라마틱한 전환점을 겪은 이후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이 영화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과연 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한계를 딛고 일어나 행복하게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영화 속에서 잭이 경험하는 것처럼,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습관이나 통념과 완전히 결별하고, 달라진 환경에 걸맞은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과거의 행복했던 몇몇 순간들을 떠올리며 안주하려 한다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렇게 좋은 주제를 가진 원작소설을 영화가 적절하게 재구성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원작 소설을 잘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 그쳤다고 할까요? 원작 속 여러 이야기를 빠짐없이 잘 보여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 그 대신 핵심적인 한 두 가지 이야깃거리에 집중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왔을 것 같습니다.

 영화 <룸>의 한 장면. 다섯 살 아이 잭 역할의 제이콥 트렘블레이와 엄마 역할의 브리 라슨. 두 사람의 뛰어난 연기 호흡은 이 가슴 아프고도 희망찬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영화 <룸>의 한 장면. 다섯 살 아이 잭 역할의 제이콥 트렘블레이와 엄마 역할의 브리 라슨. 두 사람의 뛰어난 연기 호흡은 이 가슴 아프고도 희망찬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 콘텐츠게이트


이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배우는 주인공 잭 역할을 맡은 제이콥 트렘블레이입니다. 출연 분량 자체가 많기도 하지만 나이에 비해 연기 기본기가 뛰어나고 영리해 보이는 외모까지 갖추고 있어서 관객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습니다.

그에 비해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브리 라슨이 딱히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습니다. 주로 잭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는 리액션 연기가 많기 때문이죠. 사실 그녀의 장점은 전작인 <숏 텀 12>(Short Term 12)(2013)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 영화에 캐스팅된 것도, 가정 폭력을 당한 청소년들의 쉼터 운영진으로 열연했던 전작 때문이었으니까요.

물론 <룸>에도 그녀의 연기력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습니다. 방 안에 갇혀 있을 때 잡힌 무표정해 보이는 클로즈업 샷들에는 캐릭터의 닳고 해진 마음과 현재 상태에 대한 회한, 탈출에 대한 갈망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또한 억눌렸던 감정들이 자기도 모르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후반부의 어떤 장면들에서는 불과 몇 초 사이에 서너 가지의 감정을 표현해 내는 괴력을 발휘하기도 하죠. 모두 배우의 정확한 감정 표현 능력이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연기들입니다.

대사 처리가 강조되는 연극이나 TV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 연기에서는 눈빛이나 표정의 변화로 만들어 내는 세밀한 감정 표현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설로 치면 인물의 내면 묘사가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까요. 이런 점 때문에 섬세한 표현을 위주로 하는 브리 라슨의 연기 스타일은 앞으로도 각광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잭처럼 해보기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순간들 말이죠. 하지만 모두가 성공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했던 것만큼 달라지는 게 쉽지 않을 때 제일 먼저 짚어 봐야할 것은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과거의 관념에 사로잡혀 옛날 그 자리를 계속 맴돌고만 있는 것은 아닌가요?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의 잭처럼 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날의 모든 것과 과감하게 인연을 끊고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고 꿈꾸며 그에 맞춰 새로운 삶을 살아가려 애쓰는 것 말입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그렇게라도 바꿔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가상의 방 안에 갇혀 천천히 시들어갈 지도 모를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브리 라슨 제이콥 트렘블레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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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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