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신혼의 향기를 맡고 있던 한밤 중, 우식(왼쪽, 염순식 분)-송지(가운데, 구시연 분) 부부의 집에 불청객이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바로 송지의 북한 남편, 강모(오른쪽, 김정석 분)였습니다.

달콤한 신혼의 향기를 맡고 있던 한밤 중, 우식(왼쪽, 염순식 분)-송지(가운데, 구시연 분) 부부의 집에 불청객이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바로 송지의 북한 남편, 강모(오른쪽, 김정석 분)였습니다. ⓒ 극단 C바이러스


김우식씨는 요즘 행복하답니다. 사랑스러운 아내 이민서씨 덕분이지요. 민서씨는 우식씨에게서 술 냄새가 나도 사랑스럽고, 우식씨는 민서씨가 뭘 해도 예뻐 보인다고 합니다. 달콤한 신혼의 향기를 맡고 있던 한밤중, 이 부부의 집에 불청객이 문을 두드립니다. '대체 누구야, 이 시간에….' 우식씨가 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엔 살기 어린 눈빛을 가진 한 남자가 서 있습니다.

"리송지…. 리송지 여기 있슴까?"

이질적인 말투와 눈빛을 가진 그 남자는 이런 생뚱맞은 질문을 합니다. 우식씨는 "그런 사람 없다"며 문을 닫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다짜고짜 우식씨를 밀치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선 민서씨에게 말을 건넵니다.

"송지야, 너 송지 맞지?"

남의 집에 밤중에 쳐들어오는 것도 모자라, 남의 아내를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 무례함을 우식씨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우식씨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 민서씨가 그 수상한 남자를 바라보며 충격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여, 여보!"

우식씨는 그 자리에서 기절합니다. 수상한 남자는 송지가 북한에서 결혼한 남편 함강모였습니다. 여러분도 우식씨 만큼 놀라셨나요? 더 놀라운 건, 송지에게 조선족 남편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세 명인 리송지, 그에겐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요?

고향을 꿈꾸는 연극 <아나스포라>

<아나스포라> 등장인물 관계도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구요? 글로 설명하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직접 보러오십시오. 복잡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 <아나스포라> 등장인물 관계도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구요? 글로 설명하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직접 보러오십시오. 복잡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 극단 C바이러스


위 이야기는 오는 4월 10일부터 18일까지 청담동 유시어터에서 관객을 마주할 연극 <아나스포라>의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사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지요. 이보다 비극적인 탈북자들의 사연도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단지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을 뿐이지요.

'아나스포라(anaspora)'는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짐)의 반대 의미가 있는 신조어입니다. '돌아감', '귀향', '하나 됨'을 뜻하는 단어지요. <아나스포라>는 제목 그대로 분단의 아픔으로 찢긴 민족이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연극입니다.

연극은 네 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졌습니다. 이 에피소드들은 다채로운 시공간 속에서 벌어집니다. 1951년, 2011년, 2016년을 잇는 시간은 방콕, 서울, 뉴욕, 동부전선을 연결합니다.

<아나스포라>에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만 담겨있진 않습니다. 분열의 비극을 온몸으로 느끼며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탈북자들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자살 유가족, 고아, 이민자가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극 중엔 비극이 벌어지지만, 비극을 일으킨 원흉이나 당사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길 위에 버려진 외톨이로 살아가는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뿐입니다. 인물들의 사연은 서로 다르지만, 그들에겐 '통일된 꿈'이 있습니다. 모두의 드라마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노인 기석철은 죽음의 문턱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다 같이, 돌아가자…."

"우리에게 돌아갈 집이 있슴까?"

국가보안법 최종 무죄 판결 받은 유우성 '탈북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가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취재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국가보안법 최종 무죄 판결 받은 유우성 '탈북자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가 지난 2015년 10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최종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취재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유성호


우리 사회에서 탈북자들은 '의심받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마음껏 고향을 그리워하지 못합니다.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것도 힘들뿐더러, 여차하다간 '종북'이나 '간첩'으로 보일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살려면 모국을 부정해야만 합니다. 북한에서 사용했던 이름과 말투, 생활 습관까지도 개조해야 안전합니다. 정보기관의 감시 체계, 사회의 억압적 시선이 그들을 항상 지켜보고 있습니다. '리송지'가 '이민서'로 살아야 했던 것도 그 때문이지요.

김성경 싱가포르국립대학 교수는 그의 논문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이방인', 탈북자>에서 "분단체제의 경계를 넘어온 이들은 자신들의 모국인 북한을 버리고 부정해야만 정착국인 한국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분단의 경계선 끝자락에 서 있는 '이방인'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쏘는 의심의 화살 맞을 위험이 가장 큰 사람들이지요. 한국 사람들은 탈북자를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적국인 북한에서 넘어온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하곤 합니다.

탈북자들은 어디서나 감시의 대상이 되며, 꾸준히 차별받으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이 북한을 탈출한 그들은, 또 어쩔 수 없이 고향의 기억을 지웁니다.

극 중 송지는 "북으로 돌아가자"는 남편 강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돌아갈 집이 있슴까…?"

강모는 이 질문에 고개를 숙이고 맙니다. 과거를 지운 그들에겐 돌아갈 집이 없습니다.

무대에서 이어가는 예술의 필리버스터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7일 정청래 의원에 이어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18번째 주자로 나섰다.

▲ 필리버스터에 나선 진선미 의원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2월 27일 정청래 의원에 이어 테러방지법 본회의 처리를 막기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18번째 주자로 나섰다. ⓒ 남소연


"국가의 의심은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지난 24일 테러방지법 반대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의 18번째 주자로 나선 진선미 의원은 마무리 발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 의원은 "의심받는 사람은 늘 빈민이고, 여성이고, 탈북자이고, 가난한 나라 출신의 외국인"이라고 호소했습니다(관련 기사 : 필리버스터 나선 진선미, '형제복지원' 언급한 이유).

진 의원을 비롯한 38명의 국회의원이 192시간 26분 동안 벌인 이번 필리버스터는 오랜만에 국민을 열광시킨 정치권의 '흥행작'이었습니다. 세계적인 기록도 세웠습니다. 그런데도 테러방지법안은 통과되고 말았습니다. 국가가 탈북자들을 의심하고 겁주기엔 더욱 쉬워진 셈입니다.

탈북자들이 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더 각박해졌습니다. 북한의 핵실험, 개성공단 폐쇄, 계속되는 대북제재, 테러방지법 통과…. 통일은 머나먼 남의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국회의 필리버스터는 아쉽게 끝났지만, 거리의 필리버스터는 계속돼야 합니다. <아나스포라>는 무대에서의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것입니다. 고향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한 사람,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의 손을 잡고서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나스포라>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3월 29일까지 포털사이트 다음에서는 <아나스포라>를 후원하는 '스토리 펀딩'(☞바로 가기)을 연재하는 중입니다. 따뜻한 손길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나스포라>에 큰 힘이 될 가장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4월 10일부터 18일까지 청담동 유시어터에서 하는 <아나스포라> 공연을 보러 오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공연 기간 중엔 20대 총선(4.13)이 있고, 세월호 참사 2주기(4.16)도 있습니다. 분단의 상처, 실향의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는 꿈을 품는 예술의 필리버스터에 동참하는 건 어떨까요?

덧, 앞서 언급한 송지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려드리겠습니다. 두 남편 앞에 선 송지는 해결책을 제안합니다. 바로 '셋이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이 황당한 제안에 남편들은 뭐라고 답했을까요? 송지와 남편들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다 말하면 재미없으니, 여기까지만 질문을 남겨둔 채 이만 줄이겠습니다.

연극 <아나스포라> 포스터 연극 <아나스포라>, 이문원 작/이현정 연출, 기간: 4월 10일~18일(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3시/7시, 일요일 3시, 화요일 공연 없음), 공연문의: 010-2792-6431

▲ 연극 <아나스포라> 포스터 연극 <아나스포라>, 이문원 작/이현정 연출, 기간: 4월 10일~18일(평일 오후 7시 30분, 토요일 3시/7시, 일요일 3시, 화요일 공연 없음), 공연문의: 010-2792-6431 ⓒ 극단 C바이러스


<아나스포라>가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하시나요?
이야기는 6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51년 동부전선, 학도병 기석철과 리금동은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헤어지게 됩니다. 석철은 남, 금동은 북으로 갈라집니다. 석철은 죽마고우인 금동을 버려두고 왔다는 자책감으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국군 포로가 된 금동은 북한에서 살게 됐고, 그의 손녀 송지는 60년 뒤 딸 난이를 데리고 북한을 탈출합니다. 먼저 탈북한 남편 강모는 중국에서 소식이 끊깁니다. 방콕으로 난이를 데려오기로 한 브로커는 잠적합니다. 모든 걸 잃은 송지는 방콕에서 죽으려 합니다. 그때 송지를 보고 죽은 언니를 떠올린 자살 유가족 김송아의 "이유를 찾을 때까지 살자"는 말에 송지는 살아남기로 합니다. 방콕의 두 사람 곁엔 한국 사회의 시선을 피해 여행 온 동성 커플 정훈과 재준이 희로애락을 함께합니다.

방콕에서 남한으로 온 송지는 우식과 결혼해 새 삶을 시작합니다. 이름도 이민서로 바꿉니다. 그러나 이 두 신혼부부의 집엔 자꾸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송지가 금동의 손녀라는 소식을 들은 노인 기석철이 찾아오고, 북한 남편 함강모가 찾아옵니다. 급기야 조선족 남편 왕성산도 찾아오지요.

극 중엔 기석철의 손녀 제시카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이민 간 제시카의 가족은 불화를 겪으며 쪼개집니다. 제시카는 방황을 거듭하며 갱 멤버가 됩니다. 어느 날 제시카는 북한 소년 조슈아를 만나게 됩니다. 조슈아의 가족은 탈북 이민 가족입니다. 그러나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가장인 아버지가 일가족을 살해하고 맙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연극은 궁극적으로 이 땅의 소외된 모든 사람이 연결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호소합니다. 내용이 너무 복잡하다고요? 글로 설명하기엔 어려움이 많습니다. 직접 보러오십시오. 복잡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풀어냅니다.

<아나스포라> 제작진들은 여러 명의 새터민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험난한 탈북 여정, 그리운 고향 이야기, 남한에서의 질곡의 삶 등을 접했습니다. 제작진들은 연극을 준비하면서 눈물과 땀을 한껏 흘리는 중입니다. 탈북자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정기적으로 새터민들을 만나면서 '사투리 특강'도 받았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임성현 시민기자는 연극 <아나스포라> 연출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나스포라 연극 탈북 통일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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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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