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갈 무렵 앞쪽에 앉은 관객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공연 내내 참았던 눈물을 흘리듯 몸이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나는 차마 용기 내어 울지 못했다. 지난 4일부터 오는 31일까지 성균소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 <아홉개의 하늘>(작/연출 최철)을 본 관객들의 소회다. 작은 공연장을 가득 메운 기영(서민균 분)과 인선(이현주 분)의 울림은 크다.

연극 <아홉개의 하늘>은 못다 핀 청춘의 꿈과 희망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격동의 1980년대부터 침묵의 2015년 현재 시점까지. 시점은 현재이지만, 대한민국의 시계는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건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의 역사인식은 1년 전에 집중돼 있다.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2014년 4월 16일, 기영과 인선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다. "야만의 시대에 몰아친 삭풍과 함께" 그것도 "무참하게, 허무하게"

이들의 하늘은 총 9개로 구획된다. 1983년 처음 만난 때부터 지금까지 33년 동안 말이다. 그사이에는 노동운동과 6월 항쟁, 사회주의 몰락과 IMF, 2002년 한일 월드컵과 그 이후 벌어진 정치적 주요 사건들. '아홉'이라는 숫자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모진 세월을 함께 뚫고 온 두 명의 운명과 사랑이 중요한 것이다. 신념으로 엮어진 기영과 인선의 인연은 신념으로 인해 좌절되는듯했으나, 다시 화해할 여지를 남긴다. 역사라는 거대 조류는 작고 연약한 개인들을 삼키는 듯했으나 이내 휩쓸리듯 휩쓸리지 않는다. 인선과 기영은 그렇게 인내한다. 허무라는 감옥 안에서도.

역사라는 거대 조류 안 개인들의 운명은

연극 포스터 연극 <아홉개의 하늘> 공연 포스터

▲ 연극 포스터 연극 <아홉개의 하늘> 공연 포스터 ⓒ 문화공감 공존


인선은 미싱공이고, 기영은 위장 취업한 프레스공이다. 인선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기영은 명문대 영문과생이다. 이는 마치 박노해와 김진주의 만남을 보는 것 같다. 철 지난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연극 '아홉 개의 하늘'은 개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하늘은 언제나 같다. 다만, 그 하늘을 바라보는 개인들이 지닌 욕망의 크기와 인식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일 뿐.

기영과 인선, 인선과 기영은 서로 사랑했으나 온전히 서로를 껴안지 못한다. 호감을 갖고 있으나, 기영은 동구권의 몰락과 함께 자신을 져버렸으며,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잠깐 사랑에 눈이 먼다. 고백하듯, 그것이 실수였다고 말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다. 인선은 언제나 기다려주었지만, 그 기다림에는 유효 기간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주었으나,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반성과 함께.

연극이 막바지에 흘러, 기영은 진보 신당을 준비한다. 인선은 "결국 이것이었냐"라는 푸념을 하며, 기영이 준 노트들을 돌려준다. 노트에는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담은 시와 문장들이 담겨있다. 힘없는 문장들. 자신을 배반하기도 한 문장들. 인선과 기영은 그렇게 갈라지는 듯했으나, 세월호 장례식장에서 다시 해후한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학생들이 이 둘 주위에 공존했다. 좌절의 역사는 반복되고 우리는 또다시 무너진다.

오랜만에 듣는 '바위처럼'과 'Donna Donna' 같은 노래들은 향수를 자극한다. 한때 시대를 고민했으나, 그 시대 안에 있는 자신은 고민하지 못한 후회와 이 때문에 어긋난 만남.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선을 가졌으나 끝내 이룰 수 없는 꿈은 유령처럼 오늘도 우리 주위를 배회한다.

연극 <아홉개의 하늘>은 서민균과 이현주라는 두 배우가 가진 힘에 크게 의존한다. 흔들리는 눈빛이지만 명징한 대사들과 배우들의 움직임은 관객들을 모으기에 충분하다. '아홉개의 하늘'은 이달 말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성균소극장에서 펼쳐진다.

아홉개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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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 과학 및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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