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함정>에서 준식 역의 배우 조한선이 2일 오전 서울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영화 <늑대의 유혹> 이후 2년, 그리고 <무적자> 이후 2년. 조한선은 두 번의 공백을 겪었다. 한 번의 공백이라도 배우에겐 큰 두려움이기 마련인데 그는 자신이 남긴 두 번의 백지를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청춘스타가 작품 활동이 뜸해지면서 어느새 대중에게도 잊혔다. "아, 나란 존재를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며 "그때부터... 현실적인 내 위치를 생각하게 됐다"고 조한선이 낮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오는 10일 개봉하는 영화 <함정>에서 조한선은 마동석과 함께 주연을 맡았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2012년 소집 해제 후 첫 주연이자 <주유소 습격사건2>(2010) 이후 5년 만의 주연이다. 하지만 지난 3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 다시 출발선에 선 느낌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두 번의 공백
▲ 영화<함정>에서 준식 역의 배우 조한선이 2일 오전 서울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마동석이 <함정>에서 식당을 찾는 손님을 노리는 절대 악한(성철 역)으로 등장했다면, 조한선은 그 위기에 빠진 신혼 초의 가장 준식을 맡았다. 장소는 전라도의 외딴 섬 - 이 닫힌 공간에서 조한선은 감정을 내지를 수도, 그렇다고 마냥 숨길 수도 없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땐 그 완성도가 너무 떨어져 있었다. 사실 감독님이 성철 역을 주실 줄 알았다.(웃음) 내심 속으로 '그래, 이쯤에서 살인마를 맡아도 괜찮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쥐었다 폈다 하는 인물이잖나. 근데 준식을 주실 줄은 몰랐다. 지금보다 분량이 절반 이상 적었다. 거절하려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감독님은 나와 만나서 그 분량을 함께 늘려가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믿음이 갔고, 이 작품에 날 쏟아부을 수 있겠다 싶었다."조한선은 철저히 준식이 됐다. 실제로 결혼 5년 차인 그에게 신혼을 맞은 남편은 잘 맞는 옷이기도 했다. 다만, 스릴러 장르라는 게 과제였다. 유산의 트라우마를 겪고 난 후 맹목적으로 아이를 갖고 싶어하는 감정을 표현해야 했고, 외진 식당에서 마주친 의문의 여성 민희(지안 분)에게 욕정을 품어야 했다. 예민한 감정선을 위해 조한선은 준식을 준비할 때 키와 발 크기, 좋아하는 음식을 적어두는 등 자세하게 파고들었다.
▲ 영화 <함정>의 한 장면. ⓒ 데이드림 엔터테인먼트
"사이코패스 같은 강렬함은 줄 수 없지만 과하거나 모자라지도 않는 중간 감정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사랑하는 아내(김민경 분)를 두고 다른 여자를 범하는 설정도 고민 많이 했다. 대화나 소통이 부족한 부부라고 이해했다. 또 영화 제목처럼 아내가 날 이런 상황에 의도적으로 놓아두려고 했다는 느낌을 잡고 가려 했다.(살인마 역을 한) 동석이 형도 힘들었겠지만, 피해자 입장인 나도 참 힘들었다. 긴장감을 잘 유지해야 했으니. 물론 관객 입장에선 내가 참 편한 인물을 맡았고, 나 아닌 다른 배우가 충분히 할 수 있을 역할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준식은 발끝 모양새 하나까지 나와 감독님이 상의해서 만든 인물이다. 그의 미세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성숙의 시간앞서 언급한 캐릭터 연구 방법, 그러니까 자세한 인물 정보를 만드는 건 조한선이 <열혈남아>(2006)에 설경구와 함께 출연했을 때부터 들인 습관이다. 당시 풋내기 조직폭력배 치국을 위해 조한선이 A4 용지 네 장 분량의 인물 해설지를 만든 건 이젠 유명한 일화다.
이 지점에서 그의 공백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주연작 <늑대의 유혹>(2004)으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연기를 진지하게 여기지 못했고, '강동원의 친구'라는 비교의식에 스스로를 괴롭혔던 때였다. "나름 유명세를 탔고 시나리오들이 잘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곤 했다"며 그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개인적인 집안 문제도 있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때문에 돈을 벌고 싶었는데, 연기를 해야 할 이유를 잃었다고 생각했다. (조한선은 대학 때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그러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모델로 데뷔했다고 밝혀왔다 - 기자 주) 2년 쉬고 마음을 다시 잡고 시작한 게 <열혈남아>였다. 그 사이 <연리지>라는 작품도 했는데 현장서 소통이 잘 안 돼 힘들었다. 내가 많이 부족하더라. 그걸 반면교사 삼아서 접한 <열혈남아>는 진짜 열심히 준비했다. 전라도 사투리 대사를 녹음해놓고 노래처럼 듣고 다녔다. 그때 연기가 재밌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리고 두 번째 공백, 공익근무 요원으로 근무할 당시(2010년부터 2012년) 조한선은 다시 한 번 혼란을 겪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일하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느새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잊혔다는 걸 알았기 때문. 그는 "'강동원과 영화에 출연한 애'로 불리거나, 혹은 아예 못 알아보는 분도 많았다"며 "매니저와 친한 친구들만 만나다가 접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때 이후 내 자세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열혈남아> 이후 연기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게 목표였는데,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꾸준하게 작품을 하는 배우가 되자고 다짐했다. 1등이 되고 싶진 않고, 2등 혹은 3등으로 진실한 연기를 꾸준히 하자는 거다. 내 인생에서 공백이 또 올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렇게 공백을 겪었지만 잘 넘기는 해법은 못 찾았다. 다만 단단해지긴 했다. 어떤 해법을 찾기보단 그때마다 잘 견디고 넘기는 게 좋은 거 같다.그래서 (스타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등의) 조급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 가정의 가장이 됐고, 아이도 생겼다. 이 일은 내가 하고 싶다고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체감하고 있다. <열혈남아> 이후 연기의 재미를 느꼈다면, 이제 연기는 쉽게 놓을 수 없는 무언가다. 내겐 가정을 지킬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촬영의 시작부터 끝까지 신경 쓰게 되고 다양한 각도를 생각하게 되더라. 그렇게 최선을 다하다 보면 명예와 부는 자동으로 따라오지 않을까."가장이자 비정규직 : 조한선이 정의하는 자신그 많던 팬도 잦아들었고, 팬 카페 역시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다. 좌절하지 않고 조한선은 다시 일어나기를 택했다. 최근 들어 직접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기도 한다. "이렇게라도 팬들과 생각을 나누는 게 너무 좋다"며 그가 웃어 보였다.
가장이자 비정규직. 조한선이 자신을 정의하는 단어다. 아내와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그의 지상 목표가 됐다. 단순히 좋은 배우나 좋은 연기로 눙칠 수 없는 숭고함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함정>을 두고 그는 당당했다. "굳이 <함정>을 꼭 보라고 하고 싶진 않다, 끌리면 보시라"며 "냉정하게 보시고 쓴소리 할 게 있으면 꼭 해 달라, 그래야 나도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그의 한 마디가 머리에 남는다.
"그럼에도 <함정>에 참여한 나 스스로에게 한 표를 주고 싶다, 나머진 관객들의 몫이다."어느새 자신을 온전하게 관객에게 던지는 법을 조한선은 익히고 있었다.
▲ 영화<함정>에서 준식 역의 배우 조한선이 2일 오전 서울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