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 모험의 시작 한국 메인 포스터

▲ 서유기 : 모험의 시작 한국 메인 포스터 ⓒ (주)마운틴픽쳐스

주성치가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선리기연>과 <희극지왕> 이후 주성치의 팬이 되어버린 내게 지난 10년은 말 그대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 이후 그처럼 '희극의 왕'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가 있었던가. 짐 캐리, 로완 앳킨슨 같은 유명 희극배우들도 존재하지만 주성치만큼이나 꾸준하면서도 다양한 시도를 거듭해온 희극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주성치의 지난 10년은 흐릿한 아쉬움이었다. <소림축구> 이후 할리우드 자본과 결탁해 <쿵푸허슬>을 찍었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 CJ7 - 장강 7호 >를 만들기도 했지만, 주성치의 진면목을 기억하는 팬들에겐 어딘지 부족함만 느껴졌다.

주성치의 빛나는 필모그래피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있다면 아마도 <서유쌍기>일 것이다. 1편 <월광보합>과 2편 <선리기연>으로 이뤄진 이 영화는 시간의 굴레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잃고 부처의 길을 좇았던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영화는 <서유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작품들이 그러했듯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주성치 특유의 진솔하면서도 코믹한 연기가 러닝타임 내내 뿜어져나오는 명작으로 기억된다. 애절한 사랑과 감정을 증폭시키는 멋드러진 대사들, 절묘한 패러디와 유쾌한 코미디가 환상적으로 어우러진 이 영화는 주성치는 물론 홍콩 영화계를 통틀어 짝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다.

주성치가 곽자건과 함께 연출을 책임지고 다시금 <서유기>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은 주성치와 <서유쌍기>를 기억하는 이들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비록 주성치가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문장, 황보, 서기, 나지상, 석행우, 주수나 등 홍콩의 이름있는 배우들이 다수 출연하고, 무엇보다 주성치가 직접 만든 영화라는 점이 기대의 이유였다. 어디까지나 유진위 감독의 연출작이었던 <서유쌍기>와 선을 긋고 새로운 <서유기>를 탄생시키기 위해 주성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현장을 <서유기>의 주인공으로 돌려놓다

서유기 : 모험의 시작 CG의 완성도엔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그 쓰임은 훌륭하다. 사진은 영화의 초반부 남편과 아이를 잃고 요괴와 마주한 여인

▲ 서유기 : 모험의 시작 CG의 완성도엔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그 쓰임은 훌륭하다. 사진은 영화의 초반부 남편과 아이를 잃고 요괴와 마주한 여인 ⓒ (주)마운틴픽쳐스


<서유기>는 당나라 때의 실존인물인 삼장법사가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온 사실을 토대로 쓰인 판타지 소설이다. <수호전> <삼국지> <금병매>와 함께 중국의 4대 기서로까지 꼽힌다. 스스로의 재주만 믿고 안하무인으로 날뛰던 손오공이 불문에 귀의하여 삼장법사의 제자가 되고, 81가지의 고난을 극복하며 천축국에서 경전을 구해온다는 이야기가 대략적인 줄거리다.

인물들에게서 이렇다 할 성장이 보이지 않고 81가지의 고난도 평면적인 에피소드의 나열로 그려져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온갖 요괴와 다채로운 기물들을 등장시키는 상상력 만큼은 비할 데가 없다. <드래곤볼> <날아라 슈퍼보드>, 그밖에 영화와 만화 등으로 수없이 변주되었을 만큼 시대를 초월한 생명력과 친숙함을 갖췄다는 게 <서유기>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하겠다.

<선리기연>을 통해 영화사상 가장 멋스런 손오공을 연기해냈던 주성치가 다시금 <서유기>를 집어든 건 소설이 가진 다채로움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손오공에 밀려 오랫동안 조역으로 밀려났던 현장을 다시금 무대의 중앙으로 끌어오는 것부터 영화를 시작했다.

<삼국지>의 관우와 장비가 유비보다 사랑받고, <수호전>의 이규가 송강보다 주목받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서유기>의 손오공은 실질적인 주인공 현장보다 더욱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받아왔다. 하지만 주성치는 상상력을 통해 현장의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보충함으로써 그를 <서유기>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만들어냈다.

독보적인 능력으로 기존 질서를 뒤흔들었던 손오공의 활약이 주는 쾌감이야 비할 바가 없는 것이지만, 그 때문에 현장의 이야기가 소외받아왔음을 주성치는 안타까워 한 것도 같다. 범태육골 인간의 몸으로 온갖 고난을 겪어내며 경전을 얻어온 현장이야말로 <서유기>의 진정한 주인공인데 말이다.

하지만 손오공의 거침없는 활약은 수백 년간 민중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욱 극화되고 풍성해진 데 반해, 특출난 능력 하나 없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근근이 걸음을 떼는 현장의 모습은 조롱거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이었다. 실제로 유진위의 <서유쌍기>가 그리고 있는 현장의 모습은 비겁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정도이며, 현장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다른 창작물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에 <서유기: 모험의 시작>의 특별함이 있다.

허술해야 매력적인 주성치의 영화, 미완성의 미학?

서유기 : 모험의 시작 퇴마의 무기로 아가(동요)삼백수를 건네는 스승. 놀라지 마시라, 애들에게 불러주는 그 동요다.

▲ 서유기 : 모험의 시작 퇴마의 무기로 아가(동요)삼백수를 건네는 스승. 놀라지 마시라, 애들에게 불러주는 그 동요다. ⓒ (주)마운틴픽쳐스


영화는 제목이 말해주듯 현장이 제자들과 천축국으로 떠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원전이 다루지 않고 있는 부분을 그려 원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사려깊은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다분히 <서유기>의 프리퀄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고, '모험의 시작'이란 부제를 붙임으로써 정체성을 확실히 한 듯 싶다.

주인공은 '동요300수'를 가지고 요괴를 구제하려는 퇴마사 현장이다. 그는 스승의 명에 따라 동요를 통해 요괴의 마음에서 진선미를 일깨우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좌절한다. 그러던 어느날 현장은 어느 객잔에서 살육을 일삼는 요괴 저팔계를 만나지만, 제압하기는커녕 오히려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실망감을 토로하는 그에게 스승은 최강의 요괴인 손오공을 찾아 도움을 받으라는 가르침을 준다. 영화는 손오공을 찾아나선 현장을 뒤따르며 그가 겪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스크린 위에 펼쳐보인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은 비록 주성치가 등장하지 않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주성치의 색깔이 강하게 녹아든 작품이다. 절묘한 패러디는 홍콩과 할리우드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유명한 작품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넘실대는 몸개그와 능청스런 유머들은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관객들의 웃음보를 터뜨린다.

근래에 본적 없는 후시녹음과 어딘가 어설픈 CG도 의도된 연출로 여겨질 만큼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허를 찌르는 파격의 연속이다. 오프닝 시퀀스의 미숙한 액션이나 손오공과 단소저의 춤연습 장면에서처럼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부분도 그대로 담겼는데, 이에 대한 감흥이 의외로 상당하다. 완성되지 않아 더욱 완성된 것 같은 이와 같은 연출은 과거에 그러했듯 주성치의 영화를 더 즐겁고 편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서유쌍기>의 감동을 기억하는 팬들을 위한 배려 역시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선리기연>의 삽입곡이 현장의 목탁 오르골에서 흘러나올 때 관객들은 향수에 젖어들지만, 이를 동요로 개사해 열창하는 현장의 순진함엔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손오공의 등장테마도 그대로 쓰이고 있으며 남녀의 작은 사랑이 부처의 큰 사랑과 이어진다는 주제의식 역시 두 작품을 관통하여 흐른다.

<죠스> <올드보이> 지나 <죄와 벌>까지, 거침없는 변주

서유기 : 모험의 시작 스승에게 찾아와 오열하는 진현장(문장)

▲ 서유기 : 모험의 시작 스승에게 찾아와 오열하는 진현장(문장) ⓒ (주)마운틴픽쳐스


영화는 시작부터 전 세계 이름난 작품들을 거침없이 변주한다. 때로 너무 진지하고 또 유쾌해서 패러디와 오마주의 경계를 인식하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이와 같은 장면들이 잘 녹아들어 영화를 보는 맛을 배가시키고 있다.

초반부 어촌 마을에서 벌어지는 요괴와의 대결은, 요괴가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를, 모습을 드러낸 이후엔 봉준호의 <괴물>을 떠올리게 한다. 저팔계와 대면하게 되는 객잔신의 설정과 그곳에서의 액션은 홍콩무협물 <신용문객잔>과 로베르토 로드리게즈의 좀비액션물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유사하다. 멧돼지와 같이 변한 저팔계의 모습에선 자연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가 떠오르고, 현장이 손오공을 찾아 산을 오르는 부분부터 그와 조우하기까지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과 <호빗>시리즈를 참고한 듯도 하다.

손오공이 처해있는 상황은 박찬욱의 <올드보이>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한데, 한국관객들에겐 반가운 볼거리일 듯 싶다. 클라이맥스 부분부터는 <다크나이트> <아이언맨> <킹콩> <파워레인저> <매트릭스> <딥 임팩트>, 나아가 소설 <죄와 벌>의 변주가 쉴새없이 이어진다. 영화값을 몇 배로 받아도 그 값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특히 클라이맥스가 압권이다. 극강과 극악을 아우르는 캐릭터는 히스 레저가 연기한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보인 존재감 이상이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펼치는 그의 활약은 관객들로 하여금 충격과 공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끔 한다.

이로부터 결말까지 이어지는 십여 분이 백미라 할 만하다. 거침없이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장면들이 이어지며 마침내 <서유기>의 시작으로 귀결되니, 바로 이것이야말로 내가 기다린 주성치이고, 새 시대의 <서유기>이며, 영화를 예술의 한 갈래로 놓아두는 이유이구나 싶을 정도다. 감동과 감격으로 거의 눈물이 날 지경이 되어 엔딩크레딧을 맞이하니 <선리기연>의 지난 감흥이 새삼 떠오르는 듯도 하다.

<서유기: 모험의 시작>, 또 하나의 걸작이 탄생했다

서유기 : 모험의 시작 단소저를 연기한 서기.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 서유기 : 모험의 시작 단소저를 연기한 서기.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 (주)마운틴픽쳐스


감히 단언컨대 이 영화는 주성치 희대의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거침없는 파격과 재기넘치는 변주,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창조와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으로써 부족함 없는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근두운을 타고 여의봉을 휘두르며 요괴들을 제압하는 손오공과 같이 첨단 테크놀로지를 무기삼아 영화를 만들어가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있다. 그리고 한 켠에는 묵묵히 자신만의 영화를 완성시켜 가는 주성치와 같은 작가들도 있다. 오래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난 주성치의 영화에선 한 발 한 발 걸어 천축국에 당도하려는 현장의 마음이 읽히는 듯도 하다.

<서유기>의 끝에서 결국 경을 받아든 건 손오공이 아니라 현장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서유기 : 모험의 시작 (주)마운틴픽쳐스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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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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