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이는 사업계획서 결재에 성공했지만 마부장의 승진 욕심에 밀려 가로막힌다.
CJ E&M
이를테면 원작에서 그려진 사내 기획안 공모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안영이가 제출한 기획안은 모두에게 인정받았지만, 마부장의 강요에 의해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안영이는 이때 처음 진짜 유리천장에 가로막히고, 분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쏟는다.
물론 드라마 속에서도 해당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마부장은 본사 차원에서 승인이 떨어진 안영이의 기획안을 포기시키려 한다. 정과장(정희태 분)의 호소에 절벽까지 내몰린 안영이는 마부장 앞에서 자신의 기획안을 비판하고, 본사에 사정상 기획안 진행이 어렵다는 메일을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영이의 기획안은 끝내 채택되지만, 이는 그가 온갖 핍박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버텨낸 후의 갈등 해소를 묘사하는 한 가지 설정에 불과해 보인다. 왜 마부장이 밀었던 기획안이 리턴됐는지, 작성자 본인이 포기한 기획안이 어떻게 다시 채택됐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과장의 "네 기획안 됐다더라" 한 마디에 자원팀은 환하게 웃는다.
이는 모두, 커피는 물론 구두에 담배 심부름까지 묵묵히 해내던 안영이가 급기야 사수의 무리한 요구에 목숨을 건 '무식한' 짓을 하고난 후에야 벌어진 일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하대리의 욕설 퍼레이드는 안영이를 자원팀의 일원으로 인정하겠다는 뜻에서 한 행동이었나보다.
이미 안영이는 사소한 험담이나 괴롭힘 따위는 쿨하게 무시하고 일로서 인정받던 초반의 당당함을 잃어버렸다. 이러한 변화가 안영이라는 캐릭터의 소위 먼치킨(터무니없을 만큼 무적의 능력을 갖춘 캐릭터)적인 면모를 좀 더 현실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였다고 읽힌 것은 잠시였다.
기센 여자들 등살에 살 수가 없다며 투덜대는 마부장 앞에서도 "듣는 사람이 성적으로 불쾌감을 느꼈다면 성희롱이라고 생각됩니다"라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안영이는 자원팀원들의 간단한 요구에도 매번 "네?"라며 되묻기나 하고 "사무실에서 분내 맡기 싫다"는 성희롱에 하이힐을 단화로 갈아 신는 어리숙한 신입이 됐다.
이쯤되면 외려 '알파걸' 캐릭터 중 최고의 판타지였던 <직장의 신> 미스김(김혜수 분)이 그리워질 지경이다. 미스김이라면 장그래(임시완 분)와 대화하던 안영이를 앞에 두고 "본처가 남의 집 가서 첩질하는 기분"이라 말하는 하대리의 인중을 후려쳤을 텐데.
러브라인 없다더니...안영이 과거 속 질척한 연애 감정드라마 <미생>이 하반기 최고의 드라마로 자리매김한 데에는, 직장인들의 현실적 애환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는 점 이외에도 천편일률적 '러브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주효했다. <미생> 원작이 공중파에서 러브라인이 없다는 이유로 제작되지 않았다는 윤태호 작가의 인터뷰가 케이블 드라마 특유의 신선함을 더욱 부각시키기도 했다.
젊은 남녀가 하루 종일 한데 모여 있는데 정분이 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반갑고 새로운 시도인가. 비록 회를 거듭할수록 '남남케미(남자 캐릭터 사이의 조화)'에 천착한 서비스 컷들이 등장했지만, 이것이 많은 시청자들을 열광시키는 재미 요소였음은 분명하다.
사실 안영이를 향한 장백기의 은근한 눈길은 드라마 <미생>에서 내내 포착할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발견되는 핑크빛 기류는 없었다. 그러나 점점 과도해진다 싶었던 장백기의 오지랖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안영이의 캐릭터 저변에 깔려 있던, 전 직장 사수 신팀장(이승준 분) 관련 에피소드는 단순 치정극으로 변모했다.
안영이가 퇴사한 삼정물산이 원인터와 거래하게 됐을 때의 이야기를 보자. 원인터로 찾아온 신팀장을 본 안영이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릴 때, 주변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팀장의 아련한 눈빛과 그 앞에서 당황하는 안영이의 모습을 확인했지만 <미생>이기에 그들 사이에 남녀간의 애정은 끼어있지 않기를 바랐다.
아버지와 신팀장만 등장하면 급격히 자신을 잃어버리며 실수를 연발하는 안영이는, 결코 속내를 털어 놓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다는 자립심에 기반한 행동이라기엔 너무 당황한 티를 냈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문제일까.
장백기는 안영이에게 받은 셔츠의 답례로 구두를 선물한 날, 회사까지 찾아와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 앞에서 결국 고개를 숙인 안영이를 위로한다. 왜 그가 거기까지 따라가서 기다려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안영이는 장백기와 한강에 나란히 앉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털어 놓는다. 그렇게 열리지 않던 안영이의 입이 그의 숨겨진 이야기를 고백하고 난 후, 장백기는 말한다. "신팀장, 좋아했어요?" 그리고 안영이는...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때, 원작에서 마부장에 의해 기획안을 좌절당하고 술 취해 우는 안영이에게 장그래가 "영이씨는 더 예뻐도 될 것 같다"며 목걸이를 선물하는 장면이 오버랩 된다. 나름의 생존방식으로 '남자다운' 삶을 살아온 안영이가 "남자답다는 것 시시하네요"라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서는 자신을 부러 남자의 틀에 구겨 넣으려 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드라마 속 안영이의 과거는 그를 놓아주지 않은 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질척한 연애 감정만을 남겼을 뿐이다. 안영이가 장백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에, 삼정물산을 나와 원인터에 취직한 계기는 도전이나 모험심이 아닌 연애 감정에 기반을 둔 돈거래가 되어 버렸다. 안영이는 결국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에게 다시 50만 원을 부칠 것이다. 그의 인생은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옭아매 온 남자들의 기억에 붙잡힌 채다. 달라진 것도, 극복된 것도 없다.
'워킹맘' 선차장, '백마탄' 오차장 없으면 어쩔 뻔
▲<미생>의 '워킹맘' 선차장(신은정 분).CJ E&M
안영이가 '알파걸'이라면 선차장은 '워킹맘'의 전형이다. 입사 동기 중 가장 빠르게 출세한 그는 원인터 뿐만 아니라 모든 커리어우먼들의 꿈이기도 하다. 극 중 오차장의 말을 빌자면 '무역특공대 중 강단 있기로 소문난', '원인터의 에이스'이면서도 대개 여성 관리직에게 요구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는 선차장. 사내 '공공의 적'인 마부장의 어이없는 요구를 논리적 반박으로 격파하며 부하 직원들까지 지켜내는 그의 모범은 남녀를 불문하고 '함께 일하고 싶은 상사'의 모범이었다.
그런 선차장에게도 고뇌는 있었다. 가사 및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 어린이집에 맡긴 아이가 그린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선차장의 슬픈 표정은 '워킹맘'의 비애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낸 대목이었다. 또 선차장이 남편으로부터 퇴사 후 가사에 전념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괴로워하는 장면 역시 남성보다 여성의 커리어가 희생되는 것이 쉽게 여겨지는 사회적 부조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에 오차장은 "여자가 차장 직급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피상적으로밖에 생각을 못 한다"며 선차장을 위로한다.
문제는 선차장으로 대표되는 '워킹맘'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매번 오차장 개인이라는 데 있다. 물론 동료들의 협조는 워킹맘들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도적 문제가 제기될 참이면 항상 오차장이라는 '백마탄 왕자님'이 등장해 모든 갈등을 영리하게 해결해 버린다.
바쁜 선차장의 아이를 어린이집에서 대신 데리고 오는 부분, 과로로 쓰러진 선차장의 일을 돕는 부분에서 모두 오차장의 입김이 작용한다. 특히 신입 4인방이 오차장의 지시 하에 호텔에 모여 1박 2일 선차장의 프로젝트를 처리하는 장면은 그들의 성장담에 선차장의 이야기를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또 선차장은 이 모든 조력을 감사히 받으며, 의무적으로 병원에 얼굴을 비추고 간 부하 직원들을 언급하며 배신당해 서운하다는 내색을 한다. 자신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상황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는 직장의 생리를, 선차장이 모를까? 여기서 발생하는 위화감은 그가 어떻게 남초 회사에서 차장까지 고속 승진할 수 있었으며, 그녀의 목표는 무엇이었고, 왜 커리어를 포기할 수 없었는지의 과정이 배제된 채 '성공한 워킹맘 선차장'이라는 결과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었기에 발생한 부작용이다.
물론 드라마를 통해 거국적인 해결책이 제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쩌면 오차장보다도 더 힘들게 버텨왔던 선차장의 직장생활은 그저 타인의 성장담을 매끄럽게 풀어내기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워킹맘은 죄인이다"라며 자조하는 선차장의 이야기가, 좀 더 섬세하게 그려질 수는 없었던 것일까.
과연 안영이와 선차장은 '완생'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사실 드라마 <미생>이 붕괴시킨 캐릭터는 여성 직장인 뿐만이 아니다. 3일 만에 무역용어 사전을 통째로 외웠던 장그래는 입사 2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하면서 정규직을 욕심낸다. 인턴 시절부터 반짝반짝 빛났던 서울대 출신 엘리트 장백기는 고졸 계약직 사원에게 느끼는 열등감으로 주위를 답답하게 하더니 어느새 상사에게 "제가 멀티태스킹이 안 돼서요"라며 히죽대는 '모질이'로 전락했다. 발군의 친화력과 눈치를 갖춘 한석율(변요한 분)은 사내 인트라넷에 상사의 뒷담화를 대놓고 올릴 정도로 앞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불도저가 됐다.
<미생>의 주요 갈등은 모두 속이 검은 인물들이 벌이는 거래처와의 뒷거래로 대체됐고, '인생이란 자신만의 바둑을 두는 것'이라는 작품관은 묘하게 뭉개졌다. 현실 직장인들의 애환을 밀도 있게 표현했다며 높은 평가를 받아온 <미생>이기에 아쉬운 부분들이다.
특히나 여성 직장인들의 현실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희망을 피상적으로밖에 그리지 못했다는 점은 실망스러웠다. <미생>이 역설하는 여성 직장인들의 '완생'이란, 한석율이 안영이를 묘사했던 말처럼 '남자 여자'가 되고, 최종적으로 '갑'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정답은 없어도 해답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의 여성캐릭터들은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 캐릭터 비중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깊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에 드러난 어이없도록 불합리한 이야기들이 현실의 일부분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아직 마부장은 곳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 현실이라는 단어 앞에는, 반드시 '바꿔나가야 할 '이라는 단서가 붙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p.s. 배우들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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