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무더웠던 1972년 7월 19일. 그날 저녁 서울운동장에서는 국내 고교야구 판도를 바꾸는 대향연이 펼쳐졌다. 제26회 황금사자기 결승전(군산상고-부산고) 경기였다. 이날 군산상고는 군산 시민의 높은 관심과 열광적인 응원에 힘입어 극적으로 역전승, 밤하늘에 나부끼는 황금사자기를 가슴에 품는다. 그 배경에는 명장 최관수(1943~1998) 감독이 있었다. 야구 명문 인천 동산고와 기업은행 에이스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던 최 감독,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동산고 3학년 때 국가대표 되다
▲ 동산고 1학년 야구부 시절 최관수. ⓒ 최관수
인천 동산고 시절 투타에 재능을 보였던 최관수는 2학년 때 '제3회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한다. 1958년 제정된 이영민 타격상은 대한야구협회가 한해 고교야구대회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올린 선수에게 수여한 상이다. 그는 1960년 전국대회에 3회 출전해 23타수 11안타(타율 4할 7푼 8리)를 기록하였다. 2위와 3위는 경동고의 오춘삼, 백인천이 각각 차지했다.
2학년 때부터 초고교급 투수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미래 '한국의 에이스'로 기대를 모으며 많은 기록을 남긴다. 1960년 가을에는 일본 학생야구연맹 초청경기(10월 26일~11월 11일) 일본원정팀 투수로 발탁된다. 마운드 보강차원에서 다른 수비수와 교체되어 합류한 그는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 경기에서 선발투수로 출전해 호투한다.
1961년 8월 부산에서 개최된 제13회 화랑기대회 때는 4경기에서 모두 완봉승을 거두며 우승,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는 결승전에서 부산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 기록을 작성하고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그해 8월 1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재일교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탈삼진 16개를 기록하며 완투승(6-1)을 거둔다.
그해 연말에는 <동아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스포츠 신인 10걸'에 든다. <동아일보>는 "동산고 3년생 최관수군의 존재는 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며 "투수가 빈곤한 우리나라 실정에 비추어 앞으로 기대되는 선수"라고 평가하였다. 당시 그는 19세 나이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1962년 1월 대만에서 열리는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앞뒀다.
기업은행 시절, 실업야구 최초로 노히트 노런 기록1962년 1월 4일 대만 송산(松山) 구장에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1차 리그 최종일 경기(한국-필리핀)가 열렸다. 이날 한국팀은 2루타 4개를 포함, 안타 11개를 퍼부으며 필리핀을 3-1로 따돌리고 2위를 차지한다. 선발로 나선 약관의 최관수는 4회까지 안타 3개를 허용하고 삼진 6개를 잡아내며 승리를 견인하였다.
▲ 기업은행 입단 첫해인 1962년 김성근(왼쪽) 최관수(오른쪽) ⓒ 나창기
최관수는 1962년 봄 동산고를 졸업하고 기업은행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다. 우완투수인 그는 좌완투수이자 재일교포 2세인 김성근(고양 원더스 초대감독)과 함께 팀을 끌어간다. 두 사람은 한 살 차이로 김성근이 손위다. 최관수는 주위에서 '반쪽발이'라고 조롱할 때마다 괴로워하는 김성근 투수와 끈끈한 정을 나누며 형제처럼 지냈다. 김성근 감독 아내(오효순)를 소개했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한다.
1963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9월 21일~29일)에 김응용, 박현식, 박영길 등 쟁쟁한 멤버들과 함께 발탁되어 한국이 동대회 참가 이후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조한다. 당시로써는 가장 큰 국제대회였으며 한국 선수들은 일본을 1차 리그에서 5-2, 2차 리그 최종전에서 3-0으로 제압하고 선수권을 획득하여 더욱 환영을 받았다.
한국 야구는 1963년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고등학교, 대학팀 졸업자들의 최고 희망 직장이었던 전국의 은행과 국영기업체 등 14개 실업팀이 대거 창단하여 학생 선수들의 진로가 활짝 열렸다. 1964년에는 국내 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실업야구 페넌트레이스(정규리그)가 펼쳐지고 학생 야구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 기업은행 시절(1965)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최관수 투수. ⓒ 최관수
실업야구 정규리그 첫해인 1964년은 109일 동안 312게임을 소화했고, 기업은행이 우승한다. 최관수는 우수선수상을 받는다. 70일에 걸쳐 140게임을 치른 1965년 정규리그에서 최관수는 15승 6패를 기록, 영예의 최우수선수상과 최다 승리투수상을 거머쥔다. 그는 1966년에도 17승 9패의 놀라운 기록으로 최우수 투수상을 차지한다.
1965년 실업야구 1차 리그 최종일, 기업은행-철도청 경기가 용산 육군구장에서 열렸다. 경기 결과는 기업은행의 3-0 완봉승. 이날 선발로 등판한 최관수는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철도청 타선을 완전 봉쇄한다. 4회 말 포볼을 허용해 퍼펙트게임을 놓쳤으나 그에게는 실업야구 최초로 노히트 노런 기록을 작성한 의미 있는 경기였다.
최관수는 1966년 미국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다. 이 대회에는 한국, 미국, 일본, 필리핀 네 나라가 참가해 실력을 겨뤘다. 당시 신문들은 '하와이에는 한국인 교포 3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은 한국팀 환영 후원회까지 구성했다'고 보도하였다.
고교 시절부터 좌우 허를 찌르는 빠른 직구와 예리한 커브, 타자 앞에서 정확히 떨어지는 드롭(Drop)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명투수로 인정받았던 스타플레이어 최관수. 그는 1967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였고, 1970년 봄 어깨부상으로 12년 동안의 현역생활에서 은퇴한다.
군산상고 감독으로 부임... 시민의 정성 이어져
▲ 최관수 감독 취임식. (이 사진 뒷면에는 부임 첫날이라는 설명과 함께 김봉연, 노석균, 나창기, 하태문 등 군산상고 선수들 이름이 적혀 있다) ⓒ 최관수
1970년 7월 23일 오전 군산상업고등학교(아래 군산상고) 운동장에서 조촐한 취임식이 열렸다. 그해 봄 현역에서 은퇴를 선언한 최관수 기업은행 투수가 군산상고 야구부 3대 감독으로 부임하는 자리였다. 당시 최 감독 나이는 스물여덟. 지도자 경험이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를 맞이하는 선수들의 눈은 빛났고,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최 감독의 또 하나 직책은 기업은행 군산지점 행원. 그는 은행에서 월급을 받고, 출근은 군산상고 운동장으로 하였다.
최 감독이 취임식을 마치고 선수들에게 던진 첫마디는 "우리 심심한데 베이스러닝이나 하면서 몸 풀어볼까"였다. 그 말은 감독, 선수 모두 주자가 되어 홈베이스에서 1루, 홈베이스에서 2루, 3루를 사력을 다해 20~30차례씩 뛰자는 것. 당시 2학년이었던 나창기 호원대 야구부 감독은 "첫 대면부터 곤욕을 치렀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시 1학년이었던 김준환 원광대 야구부 감독은 "동계훈련 때는 선수들이 추운 지방 사람들이 신는 무거운 방한화(경성고무 제품)를 신고 왕복 25km쯤 되는 군산비행장까지 러닝을 했다"면서 "눈보라가 몰아치는 해망동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오던 (최관수) 감독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라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인구 11만을 힘겹게 턱걸이하던 지방의 작은 항구도시 군산. 최관수 감독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은 시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 첫째 이유는 군산에 초중고 야구팀 여섯 개를 창단한, 그래서 시민 모두가 신뢰하는 이용일 경성고무(주) 사장이 어렵게 영입한 인물이라는 것. 두 번째는 항상 과묵하고 자신을 낮추는 최 감독의 처세였고, 세 번째는 그의 화려한 선수 경력이었다.
군산 시민은 1960년대 후반부터 떠도는 '폐항(閉港) 위기설'에 불경기까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파구는 지속적인 항만 준설작업이었다. 당시 정부는 예산을 이유로 외면했다. 형편이 그러함에도 최 감독 취임식 닷새 전(7월 18일) 경성고무 공장에 대형화재가 발생하자 범시민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시민들은 감사를 표하기 위해 사무실과 가게를 찾은 이용일 사장과 최관수 감독에게 깊은 관심과 격려를 보냈다.
'군산상고 야구는 군산시민의 야구'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시민들은 최 감독이 무명의 군산상고를 일약 야구 명문으로 끌어올릴 것으로 예측이라도 한 듯 열과 성의를 다했다. 군산의 향토기업들은 최 감독이 권유하는 방식으로 정기예금이나 덩치가 큰 정기적금을 계약하였고, 개인 사업가와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들도 통장을 개설했다.
이웃의 권유로 거래 은행을 아예 옮기는가 하면, '이자 없이 빌려줬다가 받은 셈 친다'며 적금을 들었다가 중간에 해약하는 사람도 있었다. '적금을 들어줘도 2~3회 넣고 그만두면 권유자에게 도움이 안 된다'며 절반 이상 내고 해약하는 사람도 많았다. 군산 시민의 정성은 그만큼 각별했고, 그 결과 최 감독은 예금권유 실적 전국 1위 행원으로 뽑혀 표창을 받았다.
창단 후 처음 거머쥔 전국대회 패권
▲ 장항 나루터에서 몸을 푸는 최관수 감독과 선수들(1970년대 중반). ⓒ 최관수
최관수 감독은 전심전력을 다해 선수들을 가르쳤다. 선수들보다 아침 일찍 운동장에 나오는 등 솔선수범의 행동으로 지도했다. 직접 마운드에 올라 위력적인 볼로 타자들의 타력과 선구안을 길러주었다. 실업야구계를 주름잡던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선수 개개인의 소질을 계발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경기력 수준을 한층 높였다. 또한 '뛰어난 선수가 되기에 앞서 도리를 다하는 인간이 되라'고 권한다.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추석날 훈련하던 선수들이 막걸리를 몰래 마시고 사고를 쳤다. 학교는 처벌하려 했으나 최 감독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 잘못이니 나를 때리라"며 방망이를 건넸다. 모두 머뭇거리자 "안 때리면 내가 이곳을 떠나겠다"고 경고했고, 선수들은 펑펑 울면서 '하늘같은 감독님'을 때렸다. 이후 선수들은 하나로 뭉쳤고, 그 '끈기와 근성'으로 1971년 전국체전 정상에 올랐다.
1971년 10월 12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2회 전국체전 야구 고등부(군산상고-배재고) 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전북대표 군산상고가 서울대표 배재고를 1-0으로 누르고 우승하는 순간 선수들과 감독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수천의 관중도 야구의 새 역사 탄생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국야구 역사상 전국대회 패권을 전북 대표팀이 처음으로 차지한 날이었으니, 군산상고 우승은 그해 체전이 낳은 가장 값진 기적이었다.
게임이 종료되자 선수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최관수 감독, 김병문 전 교장, 이용일씨를 차례로 하늘 높이 헹가래쳤다. 이날 새벽에 상경한 응원단 400여 명은 목이 터지라 응원했고, 게임이 끝나자 일제히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광란의 물결 속으로 휩쓸렸다. 군산상고 선수들이 투숙한 여관은 이날 밤늦도록 축하객이 줄을 이었고 수십 통의 축전이 날아들었다. 군산과 전주에서는 속히 내려오라는 독촉전화를 걸었다.
당시 언론들은 군산상고의 전국대회 첫 우승은 서울세와 영남세의 대결장이었던 한국 야구의 세력판도를 뿌리부터 흔든 태풍의 눈이라며 선수들의 투혼과 최 감독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했다. 군산상고는 1972년 황금사자기 부산고와 결승전에서도 9회 말에 대역전극을 펼치며 우승, 국내 고교야구 강팀으로 자리를 굳힌다.
최 감독이 재임한 10년 동안 군산상고는 '역전의 명수'로 재탄생하면서 전국규모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우승 6회 준우승 5회)을 기록한다. 그는 군산상고뿐만 아니라 호남야구와 한국프로야구에도 커다란 행운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역전의 명수들이 1982년 출범한 해태타이거즈 주축을 이뤘고, 전국 각 지역에 많은 팬을 확보했다. 해태는 그 저력을 바탕으로 한국프로야구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파킨슨병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1970년대 후반에 접어들자 믿을 수 없는 희한한 소문이 나돌더니 최관수 감독은 1979년 늦가을 군산상고 감독직을 사임한다. 당시 군산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사임 이유는 목 디스크. 당시엔 생소한 병명으로 대부분 어른들은 '디스크'가 무슨 병이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은 "최 감독을 떠나보내며, 하늘이 다 야속했다"는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의 회고.
"적당히 살살 좀 하지···(한참 침묵하다가). 최관수 얘기는 할수록 가슴이 아파. 군산상고가 1976년 대통령배 우승하고 얼마 있다가 기업은행 전·남북 지점대항 축구대회가 열렸지. 직원들 친목을 다지는 친선경기니까 적당히 해도 되는데,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그만 철봉에 부딪혀 쓰러진 거야. 얼마 후 후유증이 나타나더군.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가니까 파킨슨병이라는 거야. 어떻게 해. 감독 10년째 되는 해(1979) 감독에서 물러났지."
▲ 군산시 죽성동에 있는 홈런세탁소. 지금은 최 감독과 동업하던 분의 2세가 운영하고 있다. ⓒ 조종안
최 감독은 군산시민의 모금 운동과 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고 기적적인 회복을 보여 산책도 하고 부둣가로 바람도 쐬러 다녔으나 이전처럼 활동은 못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을 더듬는 등 병세는 날로 깊어갔다. 남에게 도움만 받을 수 없었던 그는 1983년 생계를 위해 군산시 죽성동에 전세를 얻어 '홈런세탁소'를 개업한다.
최연소 국가대표 출신 명장 최관수가 제2의 삶을 시작한 홈런세탁소. 다행히 일감은 많았다. 일손이 부족할 정도였다. 군산상고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세탁소를 개업했다는 소문이 금강 건너 충청도 장항, 서천까지 알려졌던 것. 그는 손님들이 가져온 양복에 주소와 이름이 적힌 딱지 붙이는 작업을 낙으로, 또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병마와 싸웠다.
역전의 명수가 탄생하던 그 날을 잊지 못하는 최 감독은 1985년 여름을 앞두고 병세가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자 '뭔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군산상고를 찾아간다. 황금사자기 대회를 겨냥, 투수코치를 자청했던 것. 그러나 며칠 후 뙤약볕 아래에서 코피를 줄줄 흘리며 쓰러져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지역 야구인과 독지가들의 온정의 손길이 이어졌다.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등 해태타이거즈 중심타자로 성장한 제자들은 하태문, 김용배, 유희명, 최병태, 나창기 등 실업팀에서 활약하는 옛 야구부 동료들과 모교 운동장에서 '보은경기'를 열고 사인볼을 팔아 치료비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최 감독의 병세는 깊어만 갔다.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
▲ 감독직을 사임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는 최관수. (1980년 10월) ⓒ 최관수
최관수 감독의 뜨거운 야구사랑은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식을 줄 몰랐다. 1996년 여름, 그는 대화가 어렵고 거동이 불편함에도 군산상고 운동장에 나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루는 연습을 지켜보다 운동장 바닥에 '찬스 때 대타 활용을 잘하라!'라고 써서 제자(나창기 군산상고 감독)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토록 야구에 집념이 강했던 그는 1998년 3월 7일 타계, 영광과 좌절로 점철된 야구 인생을 마감한다. 아래는 양희철(81) 전 전북체육회 부회장의 회고다.
"그때 내가 전라북도 체육대상 부상으로 받은 상금 500만 원이 있었지. 그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최관수 감독의 부인이 세탁소도 그만두고 삯바느질로 근근이 살아간다는 얘기가 들려오는 거야. 그 얘기를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돕기로 했지. 그때는 내가 볼링장도 운영하고 잘 나갈 때였잖아. 체육인으로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입원과 치료비는 얼마나 드는지 서울의 유명한 병원으로 알아봤지. 며칠 후 350만 원이면 가능하다고 연락이 오더군. 곧바로 최 감독 부인에게 돈을 전달했지. 그런데 얼마 후 최 감독이 덜컥 죽어버렸네. 부인은 병원에 가자고 하고, 최 감독은 안 간다고 우기고 싸웠나봐.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상을 치르고 최 감독 부인에게 전화가 걸려왔어. '애기 아빠 병을 고치라고 주신 돈이지, 저희 생활비를 주신 게 아니니 돌려드리겠다'는 거야. 얼마나 감동했는지. 살면서 그렇게 착하고 고지식한 부부는 처음 봤어. 오죽했으면 맹자의 성선설을 생각했겠느냐고. 아무튼,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야···."양 부회장 말마따나 군산의 야구팬을 비롯해 예술인과 체육인들도 '최관수 감독은 영원한 군산사람'이라는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은 군산상고를 찾는 외지인의 발길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얘긴데, 지역의 야구 꿈나무들에게 동기부여를 위해서라도 군산상고 입구에 '최관수 감독 흉상'을 제막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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