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운데)가 9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4강 네덜란드와의 경기 중 상대팀 론 플라르(왼쪽), 디르크 카위트의 수비를 피해 드리블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운데)가 9일(현지시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월드컵 4강 네덜란드와의 경기 중 상대팀 론 플라르(왼쪽), 디르크 카위트의 수비를 피해 드리블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아르헨티나가 지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24년 만에 꿈의 무대 결승전에 진출했다. 아르헨티나는 10일 오전 5시(아래 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아레나 데 상파울루에서 열린 네덜란드와의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전서 연장 120분까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으나 승부차기서 4-2로 승리하며 극적으로 결승에 올랐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1986년 월드컵 이후 28년 만에 통산 3번째 우승에 도전할 기회를 잡았다. 아르헨티나는 1990년 이탈리아 대회에서도 결승전까지 진출했지만 당시 베켄바워 감독이 이끌던 독일(당시 서독)에 0-1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공교롭게도 독일이 개최국 브라질을 대파하고 결승전에 선착함에 따라 양팀은 '24년 만의 결승전 리턴매치'라는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또한 월드컵 본선에서만 최근 3회 연속으로 맞붙게 된 양팀은 2006년 독일월드컵과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8강전에서 연이어 만났으나 당시는 독일이 모두 승리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결승행 문턱에서 또 한 번 분루를 흘렸다. 지난 대회 결승에 올랐던 네덜란드는 코스타리카와의 8강전에 이어 2경기 연속 승부차기를 치르는 혈전 끝에 고비를 넘지 못하고 월드컵 무관 탈출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이로써 결승전은 독일-아르헨티나, 3-4위전 브라질-네덜란드로 이어지는 유럽 vs. 남미의 2라운드 매치업이 완성됐다.

녹슨 창 대신 견고한 방패가 승부를 좌우했다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한 양팀의 대결은 시작 전부터 화끈한 공격축구로 기대를 모았으나 뚜껑을 열자 경기 양상은 전혀 달랐다. 양팀 모두 벼랑 끝 승부의 부담감을 반영하듯 과감한 플레이를 자제하고 수비에 무게 중심을 둔 신중한 플레이를 펼쳤다.

양팀의 주축 선수들은 이미 대부분 유럽리그에서 장기 레이스를 소화하고 온 뒤라 4~5일 단위로 벌써 6경기를 치르는 빡빡한 강행군에 이미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소문난 잔치답지 않게 두 팀은 모두 토너먼트 이후로는 경기력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르헨티나는 스위스와 벨기에를 상대로 한 골차 승부를 벌이며 악전고투했고, 네덜란드로 멕시코에 힘겹게 논란의 역전승을 거두고 한 수 아래로 꼽힌 코스타리카와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등 어려운 행보를 이어가며 불안요소를 노출했다. 한편으로 전날 또 다른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이 독일을 상대로 수비조직력이 무너지며 1-7 참패를 당한 것도 양팀의 신중함에 영향을 미친 듯했다.

녹슬어 버린 창을 대체한 것은 양팀의 견고한 방패였다. 아르헨티나는 5경기에서 3골, 네덜란드는 4골밖에 내주지 않은 수비력이 돋보였다. 이날 경기로 아르헨티나는 토너먼트 3경기 연속, 네덜란드는 2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양팀 모두 상대 공격의 시발점인 리오넬 메시(아르헨티나)와 아르엔 로번(바이에른 뮌헨)에 대한 충분한 수비 대책을 들고 나왔고, 에이스들이 나란히 집중 견제에 막혀 침묵하면서 자연히 전체적인 공격력이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두터운 스리백은 중앙에서 시작되는 아르헨티나의 볼 배급과 메시의 중앙 돌파를 철저하게 차단했다 아르헨티나는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메시의 부담을 덜어주던 앙헬 디 마리아가 벨기에와의 8강전에서 당한 허벅지 부상 때문에 결장하면서 메시 혼자 전방에서 홀로 고군분투했다.

우려한 대로 좌우 측면의 무게가 현저히 떨어진 아르헨티나의 공격은 그만큼 메시에게 의존한 중앙으로만 쏠리며 경기 후반으로 갈수록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후반 곤살로 이과인과 엔소 페레스, 에세키엘 라베치를 빼고 세르히오 아게로와 로드리고 팔라시오, 막시 로드리게스를 잇달아 투입한 사베야 감독의 교체 카드도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도 8강전에서 연장 혈전을 치른 부담감을 반영하듯 선수들의 몸놀림이 무거웠다. 토너먼트 들어 극도의 부진에 빠진 주포 로빈 판 페르시는 경기 내내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하고 연장 전반 5분 클라스 얀 훈텔라르와 교체됐다. 판 페르시의 부진은 그만큼 로번에 대한 견제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날 아르헨티나의 숨은 일등 공신은 수비형 미드필더인 하비에르 마스체라노였다. 전반 26분 공중 볼 경합 과정에서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 증세를 보이는 아찔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으나 고통을 참고 그라운드로 돌아와 연장 120분을 모두 소화하는 투혼을 보였다. 로번을 중심으로 한 네덜란드가 빠른 역습으로 기회를 노릴 때마다 한 박자 앞선 위치 선정과 거친 몸싸움으로 네덜란드의 공세를 차단하며 팀을 여러 번 위기에서 구해냈다.

이날의 가장 큰 위기였던 후반 종료 직전 로번의 돌파로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을 맞이할 뻔한 상황에서 마스체라노가 완벽한 타이밍의 태클로 이를 저지한 것은 단연 백미였다. 연장전 들어 주장 메시를 비롯한 동료들이 체력 저하로 걸어 다니다시피 할 때도 끝까지 선수들을 독려하며 실질적인 리더의 역할까지 담당한 것도 마스체라노였다. 네덜란드는 120분간 아르헨티나의 골문으로 향한 유효 슈팅이 단 3개에 불과했다는 것은 앞선에서 미리 공세를 차단한 마스체라노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운명 엇갈린 양팀 감독의 용병술

마스체라노가 승리의 초석을 닦았다면 피날레를 장식한 것은 골키퍼 세르히로 로메로의 특급 선방이었다. 이번 대회 첫 승부차기에 나선 로메로는 네덜란드의 첫 번째 키커 론 플라르와 3번 키커 베슬러이 스네이더르의 슈팅을 잇달아  막아내며 승부차기의 흐름을 아르헨티나로 가져왔다. 상대의 실축에 의한 것이 아닌 온전히 로메로의 판단력과 반사 신경에 의한 선방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메시를 비롯한 4명의 키커가 모두 실축없이 킥을 성공시키며 4-2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로메로는 알레한드로 사베야 감독의 뚝심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넘버원 골키퍼로 군림하고 있는 로메로지만, 지난 시즌 삼프도리아(이탈리아)와 임대 이적한 모나코(프랑스)에 연이어 주전 경쟁에 밀려 단 3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베야 감독은 이번 대회 전 경기에서 로메로에게 주전 장갑을 맡기며 변함없는 신뢰를 드러냈고 로메로는 절체절명의 고비에서 특급 선방으로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다.

반면 네덜란드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과감하지 못한 경기 운영이 아쉬웠다. 이번 월드컵 내내 변화무쌍한 용병술로 '신의 한수'라는 찬사를 받았던 루이스 판 할 감독의 마법은 준결승전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전력 누수가 심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지나치게 수비적인 전략에 집중하느라 경기 흐름 전체를 놓친 것은 오히려 자충수가 됐다. 후반전 초반 마르틴스 인디(경고)와 나이젤 데용(체력저하) 대신 다릴 얀마트와 요르디 클라시를 교체 투입한 것은 모두 수비적인 교체였다.

이러다보니 후반 승부를 걸 수 있는 카드가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연장전에서는 최악의 부진을 보인 로빈 판 페르시를 빼고 훈텔라르를 넣었지만 훈텔라르 역시 경고만 한 장 얻었을 뿐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다. 이번 대회 최고의 교체 선수 중 하나였던 멤피스 뎀파이를 활용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결국 120분을 소극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판 할 감독은 코스타리카와의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앞두고 교체 멤버인 팀 크룰 골키퍼를 투입하는 승부수로 값진 승리를 따낸 바 있다. 그러나 이날은 이미 교체카드를 모두 소모한 뒤라 골키퍼를 바꿀 수 없었다. 지난 코스타리카전 승부차기에서 키커로 나섰던 공격수 판 페르시마저 교체되며 믿을 수 있는 키커도 부족했다.

우려한 대로  지난 경기 승부차기에서는 나서지 않았던 론 블라르가 1번 키커로 나섰으나 처음부터 실축하며 기세가 꺾였다. 네덜란드 야스퍼르 실레선 골키퍼는 4명의 아르헨티나 키커를 단 한 명도 막아내지 못하며 대조를 이뤘다. 이번 대회를 끝으로 네덜란드 대표팀을 떠나 맨유 지휘봉을 잡는 판 할 감독으로서는 훗날 월드컵을 다시 회상할 때 통한으로 남을지 모를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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