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로보캅>을 보았다. 지하철엔 오래 전부터 영화의 예고편 영상을 틀어주기 시작했고 그 예고편을 보며 몇 가지 우려가 들었다.

일단 내 머릿속 추억으로 남은 명작을 리메이크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었지만… 뭐 그것 하나만 가지고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리메이크 작도 많고, 리메이크 작품이 꼭 원작의 기법을 고수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를테면 2005년 피터 잭슨의 <킹콩>은 1933년 작의 이중 영사 기법 대신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했지만, 원작과는 다른 면에선 훌륭한 한 편의 영화로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즉 내가 2014년 <로보캅>이 꼭 1987년의 <로보캅>과 동일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이 리뷰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2014 <로보캅>은 두 가지 점에서 불만족스럽다. 먼저 원작이 가진 고유의 장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단순히 검은색 아이언맨의 활보액션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이것저것을 담으려는 시도를 했다. 이를테면 영화 내에서 로보캅에게 공격권을 주는 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두고 다투는 것은 실제 미군이 이라크에서 무인공격기에게 공격 권한을 주는 것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한 면이 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좋은 시도에 그쳤으며, 원작은 물론이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이 비교적 최근에 제작되었음에도 이미 명작의 반열에 들어선 영화와 비교하기에는 무척 부족하다.

두 번째로 이 영화는 킬링 타임용 오락물로서의 가치도 높지 않다. 굳이 영화에서 철학적 주제 같은 것을 찾는 게 불필요하다고 치더라도, 이 영화가 보여준 액션에는 요즘 높아진 관객의 눈높이를 채울 만한 부분이 없다. 요컨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은, 이 영화는 '의미'와 '재미'라는 두 가지 토끼를 담는 데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왜 굳이 사람의 두뇌를 사용했을까

 조세 파디야 감독의 2014년 <로보캅>

조세 파디야 감독의 2014년 <로보캅> ⓒ 소니픽쳐스릴리징월트디즈니스튜디오코리아


유명한 예술품 앞에서 아우라를 느낀 어떤 관광객이 귀국 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작품을 꼭 보라고 말하는 심리처럼, 나는 부디 원작 <로보캅>이 어떤 의미를 가진 영화였는지 먼저 설명하고 싶다.

원작 로보캅의 배경은 디트로이트이다(이곳은 자동차 산업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산업 혁명기 미국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원작에서는 이 도시를 완전히 재개발한다는 '델타 시티'라는 프로젝트가 등장한다.

원작 <로보캅> 1, 2, 3편의 이야기 전개는 모두 이 델타 시티와 관련된 이권 충돌과 깊은 관련이 있다. 델타 시티 프로젝트의 수행 주체는 초거대 자본 그룹인 OCP이다. 이들이 민영화된 경찰을 인수하여 산하 조직으로 두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인력이 부족하자 동네 깡패들을 경찰로 충당한다. 그리고 시민들의 안녕을 지켜야 할 경찰은 거대 자본 회사의 산하조직이 되어 시민들을 공격한다.

민영화, 민영화 그 놈의 민영화. 게다가 용역 깡패가 공권력을 대체하는 이상한 상황. 원작에서는 절차만 밟으면 인간의 몸도 기업의 상품이 되어버리는 인명 경시는 당연한 듯 자행된다. 이 영화, 어딘가와 비슷하지 않은가?

무려 20년 전에, 정부가 해야할 일을 효율이라는 명목 하에 기업이 담당하고 그것이 사회 전반에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해악이 무엇인지 이렇게 정확하게 예측한 영화, 그것이 원작 <로보캅>이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도 나 같은 팬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다.

1987년에 개봉된 이 영화의 예지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당시 SF 소설들이 2000년대만 되어도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이 탄생할 것이라 예견한 것과는 다르게, 인공지능 발전이 장기간 답보 상태에 있을 거라고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원작의 배경이 되는 시점은 첨단 기술이 꽃을 피우는 미래이다. 그러나 정작 로봇의 인공 지능은 아시모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로보캅이 굳이 인간의 두뇌를 쓰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로봇 3원칙'을 오마주한 '로보캅 3조항'이 존재하는 것은 이 영화의 백미이다. 첫째, 공익에 봉사. 둘째, 무고한 시민 보호. 셋째, 법 질서 수호가 그것이다.

바로 이런 점들이 SF의 걸작을 논의할 때면 빠짐 없이 <로보캅>이 등장하는 이유다. 과연 2014 <로보캅>은 이런 내용을 충분히 담았을까?

내가 보았을 때는 부족하다. 발달된 인공 지능 기체들을 앞에 두고 굳이 사람의 두뇌를 사용한다는 점, 그 사람의 두뇌를 사용하는 기체가 로봇에 비해 낮은 성과를 냄에도 전면에 등장한 점 등은 원작과 다르게 왜 로보캅이 등장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단순히 감정이 있어야 국민이 찬성한다는 설정도 개연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로보캅이 금세 수십 대 로봇 이상의 성과를 내는 점은 다소 억지스럽다.

원작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배금주의와 관료주의 같은 것에 대한 묘사도 부족하다. 2014 <로보캅>은 OCP 회장의 탐욕이라는 한 개인의 행동을 통해 이 같은 비판의식을 계승하려고 하려고 노력한 것 같기는하다.

그러나 짧은 시간 내에 너무 많은 것을 버무려 내려는 시도 끝에 OCP 회장은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은 악역으로 변모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허탈한 웃음마저 자아내게 하던 원작의 냉철한 풍자는 실종되었다.  

단, 브라질 태생의 호세 파딜라 감독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미국인들의 자신감을 칭찬하는 듯 교묘히 비웃은 것 하나는 좋았다.

수트 입은 강철 병사 같은 로보캅

원작의 로보캅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로보캅이 사람인지 로봇인지 혼동을 주었다. 이 같은 혼동은 이 영화 시리즈를 관통하는 주제다.

알렉스 머피, 또는 로보캅으로 분한 피터 웰러의 표정 연기는 실로 일품. 처음 <로보캅>을 보았을 때, 문소리가 장애인으로 분한 영화 <오아시스>를 보고 외국 관객들이 실제 장애인이 연기를 했다고 오인한 것처럼 사람 모양의 가면을 기계 위에 붙여놓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기계적 걸음걸이, 로보캅의 소프트웨어를 포맷하고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설치하자 마치 컴퓨터 마냥 반복적인 대사를 반복하는 모습, 로봇이기에 악당들의 자기장 공격에 허무하게 쓰러지는 모습 등. 영화의 로보캅은 제목 그대로 로봇의 특성에 걸맞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보캅의 그런 모습, 로봇의 오작동에 불과한 배회인지 아니면 인간적 번뇌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시놉시스는 오히려 더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낸다.

원작의 로보캅은 자신이 인간일 무렵 거주하던 공간을 종종 배회하곤 한다. 로보캅이 인간이었을 무렵의 아내는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뒤 경찰서에 자신의 남편이 정말로 죽었냐고 수 차례 묻는데 관료 조직의 경찰은 무덤덤하게 그가 죽었노라고 답할 뿐이다.

만약 원작의 로보캅이 2014 <로보캅>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인지하고 자신의 집을 방문해서, "여보 나 돌아왔어"라고 말했다면 그 인간적인 아픔에 대한 감흥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인간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이 물건으로 취급되는 사회. 여기서 머피가 로보캅이 되는 것은 단순한 히어로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었던 자아가 한 회사의 부속품이 되는 것, 회사를 위해 봉사하는 로봇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이 그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가정을 버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의 평범한 한 인간에게 현실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점이 많다.

다만 그는 점차로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며 평범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영웅이 되었는데, 몇 가지 상징적인 장면이 이를 드러낸다.

그 중 하나는 로보캅의 표정 변화이다. 오리지널 로보캅의 표정 변화는 그 존재 하나하나가 영화의 전개이다. 영화 초반엔 두꺼운 헬멧에 가려 얼굴이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으며, 종종 얼굴이 드러나는 장면에서도 자아가 없는 텅빈 표정만을 지을 뿐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로보캅의 기억이 회복될수록 로보캅의 표정은 점차로 다양해지며 자신을 가리는 헬멧도 더 이상 쓰지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회장이 이름을 물어볼 때,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이름을 "머피"라고 대답한다.

나는 영화 <스파이더맨>의 여주인공이 결혼식장을 뛰쳐나와 스파이더맨에게 찾아갈 때, 스파이더맨은 현실 세계의 영웅과는 접점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 우리 세계의 영웅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한 그런 인물들이다.

현실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희생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영웅이 되어가는 이 영화의 진행 막바지 무렵 나는 로보캅을 액션 히어로물의 히어로가 아닌, 우리 시대의 대변자로서, 특히 거대 자본에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로서 그를 영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로봇물에서 진한 감동을 느꼈던 이유이다.

반면 2014 <로보캅>은 어떤가. 로봇에 머리를 올리자마자 '나'에게 왜 이런 짓을 했냐고 따지는 것 부터 시작한다. 도파민을 통해 기계적으로 로보캅을 지배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다시 자아를 찾는 과정도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순식간에 지나가 관객이 그의 고뇌에 공감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또한 범죄에 대한 분노와 진압 이외에 소외받는 자들에 대한 로보캅의 헌신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영화에서 지겹도록 보아온 할리웃 가족주의가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덤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2014 <로보캅>의 로보캅은, 지극히 주관적인 인상인지 모르겠지만 별로 로봇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는 수트를 입은 강철 병사에 더 가깝다.

2014 <로보캅> 보며 떠오른 3가지 영화

2014 <로보캅>을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3가지 영화가 있다. 첫 번째는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이다. 내 추억 속의 영웅 로보캅을 단순한 대자본 할리웃 오락물들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해야하는 불쾌함과 별개로, 영화의 액션만을 평가하자면 솔직히 이 영화의 액션은 <아이언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아이언맨>처럼 박력이 있지도 않고, 로보캅의 훈련 장면은 5년 전 개봉한 <G.I.조>의 훈련 장면보다 박진감이 떨어지며, 로보캅이 OCP 거대 로봇들과 싸우는 장면은 거대로봇들이 지나치게 무력하게 나온 탓에 오락실에서 500원을 넣으면 플레이할 수 있는 슈팅게임을 연상시키는 수준이다.

두 번째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이다. 전반적으로 최근에 제작된 액션 영화 연출의 트렌드 때문일지,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이나, 연민이 느껴질 만큼 혹독하게 범죄자들을 제압하는 장면, 흔들리는 카메라를 사용한 기법 등등에서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연상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부분부분 액션 신에는 한스 짐머 같은 거장이 작곡한 사람을 전율케 하는 OST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히스 레저가 분한 소름이 돋는 조커 같은 악당이 등장한 것도 아니며, 화려한 도시의 전경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세 번째로 떠오른 영화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첨단 기술을 둘러싼 법안의 폐기 여부를 두고 국민의 다투는 것, 이와 관련된 윤리적 문제 및 이를 둘러싼 미스터리 등을 화려한 영상미로 풀어나가는 것에 성공했다면, 2014<로보캅>의 드레이푸스 법(로봇 경찰 사용 금지법) 폐기에는 관객의 눈을 사로 잡는 시각적 즐거움도, 사람을 긴장케 하는 미스테리도, 철학적 담론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다.

내가 <터미네이터4>에서 존 코너가 바다 한 가운데로 갑자기 풍덩 뛰어들고, 아무 설명 없이 다음 장면에서 바로 저항군의 잠수함 한 가운데 그가 등장한 것을 보고도 그 영화를 나쁘다고 평하지 않은 것은 그 영화에는 그 나름의 볼거리는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2014 <로보캅>에서 망가진 내 추억을 대체할 별다른 오락물로서의 가치 역시 찾는 데에 실패했다.

영화를 보는 도중 뒷 좌석에 있는 초등학생이, "아이언맨이 더 센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요즘 아이들의 우상은 아이언맨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원작이 가진 철학적 향연들의 구현과 별개로 액션만으로 로보캅이 아이언맨과 비교되는 것도, 그리고 2014 <로보캅>이 그 대수롭지 않은 액션 이외에 달리 어필할 부분이 없다는 것도, 나이가 먹은 내 어린 시절 우상이 요즘 아이들의 우상과 비교되어야 하는 현실도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로보캅 놀이를 하며 놀았던 추억이 있는 내 세대의 당신이라면, 실망할 것을 뻔히 알고도 한 번쯤은 봐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단 조금은 더 신중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을까. 한가득한 아쉬움을 안고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로보캅 2014 로보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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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투자자, 소설가, 아마추어 기자. "삶은 지식과 경험의 보고(寶庫)이자 향연이다. 그러므로 나 풍류판관 페트로니우스가 다음처럼 말하노라." - 사티리콘 中 blog.naver.com/admljy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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