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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영국의 미술가 500명이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영향력이 컸던 미술품을 뽑았다. 결과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2면화'를 제치고, 마르셀 뒤샹의 '샘'이 그 영광을 차지했다.

이 '샘'이란 작품은 어떤 작품일까? 막상 작품을 보면, 대다수의 입에서는 '애걔~'하는 단어가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흔하디흔한 남자 변기를 거꾸로 세워 놓고, 거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마르셀 뒤샹은 이를 통해 전시장에 걸려 고결한 것으로 취급되는 그 전 세기의 미술을 비판하고, 대중의 삶 속 가장 평범한 물건들이 예술적 '오브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냈다. 이 작품은 한때 잃어버렸다 다시 복원되었음에도 훗날 100만 달러가 호가하는 예술품이 되었다.

변기였다가 20세기 최고의 예술 작품이 된 마르셀 뒤샹의 '샘'은 가장 통속적인 사람 사는 이야기가 텔레비전 통해 '막장'이 되었다가, 아침 드라마가 되었다가, 때로는 대중의 뇌리에 남을 명작이 되기도 하는 우리네 드라마와 닮았다.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망작'이 되기도, '명작'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수현 작가의 신작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이하 <세결여>)를 보면 이런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그는 행복했답니다'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김수현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출연하는 배우 이지아와 하석진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출연하는 배우 이지아와 하석진삼화네트웍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여자 주인공이 세 번 결혼한다'는 내용의 충격적 제목에서 오는 '스포일러'만 차치해 놓고 본다면 어디선가 본 듯한 이야기들이다.

스물아홉에 딸 아이 하나 데리고 이혼을 해 혼자가 되었다가, 멋진 재벌남을 만나 딸을 친정에 맡기고 재혼을 한 여자 오은수(이지아 분). 늘 '사랑해'를 주문처럼 외우는 남편에, 지각 있는 시부모님 등 무엇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환경이지만, 친정에 두고 온 딸로 인해 늘 얼굴 한 편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여자. 우리는 이런 여자를 <사랑과 전쟁>이나, 아침드라마들에서 종종 조우해 왔다. 그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도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노처녀, 그리고 그의 오랜 베스트 프렌드인 남자. 그는 오래도록 남자를 짝사랑하지만, 남자가 보낸 사랑의 작대기는 늘 그를 비껴간다.

하지만 이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가, 이제 '대가'의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품 안에서는 신선한 이야기로 둔갑하기 시작한다. 보통의 아침 드라마들이 결혼을 이혼으로 종지부 찍게 만드는 길고 지루한 '시월드'의 고통에 주목하는 것과 달리, 김수현 작가는 단번에 이야기의 시점을 아침드라마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끌고 온다. 포악한 시어머니와 간악한 시누이로 인해 고생하던 여자주인공이, 결국 지옥 같은 시집을 떠나 더 부자이고 더 멋진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수현 작가가 '대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혹은 드라마들이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서사에서 김수현 작가는 용감하게 한 발 더 나아간다. <세결여>는 '그래서 그는 행복했답니다'에서 끝내지 않고, '그래서 그가 정말 행복했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 포스터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 포스터 삼화네트웍스

그러면서, <세결여>는 부잣집 남자에 교양 있는 시부모님과 다시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여자 주인공이 포기한 것들이 그를 여전히 짓누르고 있고, 그를 놓지 못한 전 남편의 인연이 여전히 그의 삶에 한 자락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는 '행복'이라 부르는 것들이 모래성처럼 흘러내릴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당연히 <세결여>의 이야기는 여느 멜로드라마처럼 주인공들이 다시 만나고 사랑하고 아웅다웅거리는 이야기들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흔하게 매료되는 멜로 드라마적 플롯의 익숙함에, 김수현 작가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의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통속적인 이야기에 있어서 '귀재'인 작가가, 바로 그 '통속성'의 함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전히 김수현 드라마를 자기 복제를 거듭하다 단물을 다 빼먹어가는 유명 작가들의 드라마와 달리,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당대성을 지니는 문제작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작 <천일의 약속>이 젊은 여성의 치매라는 색다른 소재를 이용해 사랑과 결혼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했다면, <세결여>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김수현 식 조사 보고서가 될 듯하다. 물론 때론 그 과정에서 작가의 노파심이 앞서고, 그래서 작가의 목소리가 드라마적 재미보다 높아지기도 하지만, 2013년에도 김수현의 문제 제기는 이 시대의 결혼 풍속에 의미를 지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김수현 이지아 엄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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