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창>은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 단편 개봉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돼 11월 1일 단관 개봉한다.

연상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창>은 인디스페이스 '독립영화 단편 개봉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정돼 11월 1일 단관 개봉한다. ⓒ 스튜디오다다쇼


흔히 '군대를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사회가 말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에는 '말썽 부리지 않고 조직에 순응할 수 있는'이라는 속뜻이 생략된 걸로 보인다. 연상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창>은 군대라는 조직이 굴러가기 위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고 문제를 봉합하는 방식을 고발하고 있다.

부식창고를 개조한 내무반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없다. 모범적이라 칭찬이 자자한 정칠민 병장의 분대가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느 날, 관심사병 홍영수 이병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정철민 병장은 소심한 홍영수가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지만, 결국은 기대를 저버린 그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러 분대 전체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분노한 정철민은 홍영수를 구타했다. 홍영수는 자살을 시도했고, 정철민은 가해자로 지목돼 영창에 감금됐다. 그 이후, 내무반에는 창이 하나 생겼다.

'악한 가해자'와 '선한 피해자'에 대한 염증

11월 1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하는 단편 애니메이션 <창>은 200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한 인권만화책 <사이시옷>에 포함돼 있던 만화(연상호 글 최규석 그림)가 원작이다. 연상호 감독이 군대 시절 겪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 그는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해 정철민 병장처럼 보름간 영창에 갇혔다고 한다. 그렇다고, 가해자로서 개인적인 억울함만을 동력으로 앙심을 품고 만든 영화는 아니다.

대개 인권을 주제로 하는 이야기는 주로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는 사람들의 피해 사례를 열거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창>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모호하다. 심지어 조직이 정철민 병장을 가해자로 지목해 문제를 일단락 짓는 과정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피해자인 홍영수는 절대 선이 아닌, 오히려 굉장히 짜증나는 인물로 그렸다. 

 <창>은 연상호 감독의 군대 시절 실화를 담았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화제작이 된 <돼지의 왕> 역시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창>은 연상호 감독의 군대 시절 실화를 담았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하며 화제작이 된 <돼지의 왕> 역시 중학교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 스튜디오다다쇼


"<창>을 기획하던 당시에 인권을 다루는 작품들에 불만 같은 것이 있었어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으로 나눠, 인권유린에 대한 이슈를 사회와 조직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성향 문제로 다루는 것에 대한 불만이요.

그래서 <창>은 출발부터 가해자의 입장이나 시선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짜증나는 인물은 과연 인권유린을 당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싶었죠. 아무래도 인권이라는 것은 조직이라고 하는 큰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고 판단해서 조직이 작동하는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했고요."

"<돼지의 왕><창>, 조직과 개인의 관계는 재밌는 이야깃거리"

연상호 감독은 전작에서도 조직과 개인에 대한 날선 질문을 계속해서 해왔다. 치킨집 닭사장이 자신의 아들을 튀겨온 <사랑은 단백질>이 약육강식 법칙의 적용과 섣부른 화해가 반복되는 사회를 비꼬았다면, 15년 만에 만난 동창들이 중학교 때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돼지의 왕>은 학교라는 조직에서부터 형성돼, 세월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권력구조를 까발렸다.

재밌는 건, 어느 정도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전작들에서 감독은 늘 조직의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돼지의 왕>에서는 개들의 폭력을 방관하는 돼지 중의 하나 였다면, <창>에서는 사회가 가해자라고 지칭하는 정철민 병장이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시작한 초기 단편 때는 개인적인 일을 많이 다뤘어요. 사실 그 정도까지밖에 생각이 미치질 않았었죠. 그 후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자꾸 던지다 보니, 개인적인 성향이라고 하는 것도 대부분 사회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더라고요. 자연히 관심이 '개인'에서 '사회에 속해 있는 개인'으로 넘어갔던 것 같아요. <돼지의 왕>과 <창>은 모두 그 자장 안에서 쓴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조직과 개인과의 관계는 항상 너무 재밌는 이야기 아닌가요?"

극 중반, 정철민은 자신이 가르친 홍영수가 조금씩 조직에 적응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유토피아가 완성돼가고 있었다"고 말한다. 홍영수가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그랬다. 연상호 감독은 정철민이 바랐던 이상향을 두고 "조직이 원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면서 개개인이 공평하게 행복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조직이 하나의 성향을 가진 개인들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철저히 '정철민의 유토피아'였던 셈이다. 연 감독은 영창 안에서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구나' 깨달았다고 한다.

 연상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창>(2012)은 오는 24일 저녁 8시 서울애니메이션센터에서 상영되는 인디애니페스트 독립보행1 부문에서 만날 수 있다.

<창>에서 정철민 병장에 해당하는 연상호 감독은 "영창에 갇혔던 보름 동안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고, 그 뒤로 어떤 사안이든 확신이 설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 스튜디오다다쇼


장편 <사이비> 내년까지 완성, 선악의 이분법 뒤집는다  

결국 조직이 찾은 원인이라는 게 '창의 부재'였다는 것은 블랙코미디 같지만, 그게 현실이다. 흉악범의 얼굴을 신문 1면에 공개하는 것이 정의라 여겨지고, 학교 폭력의 원인을 게임이나 웹툰에서 찾는 우리 사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해법이기 때문이다.

연상호 감독은 준비 중인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를 통해 사회가 정한 선악의 이분법에 또 다시 딴지를 놓을 생각이다. '선한 가해자'와 '악한 피해자'가 등장하는 것이 핵심이다. 투자배급사 NEW에서 투자를 받아 5분의 1 정도 작업을 끝낸 <사이비>는 내년 상반기가 가기 전에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쉽게 정의할 수 없는 문제죠. 누군들 악하게 살고 싶겠어요. 모두 자기만의 선을 가지고 살죠. 하지만 누군가의 선은 누군가에게 악이에요. 사실 '보편적 정의'라고 하는 것은 이런 생각을 인정하면서 출발해야 해요. 내가 정의를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 출발점이 되는 생각의 시작은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애니메이션 연상호 돼지의 왕 사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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