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은 없다

한 달 전쯤일까?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을 들으면서 문득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을 맞으며 길을 걸었던 때가 생각났었다. 그야말로 낭만의 길을 걸었던 추억들. 벚꽃 하면 첫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무어냐고 내개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낭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벚꽃을 낭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과 공간이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불과 1여년 전 자연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줬다.

제9회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작 <쓰나미, 벚꽃 그리고 희망> 속에서 일본인들은, 아름다운 벚꽃의 개식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공포의 쓰나미 앞에서 넋을 잃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초반 5분, 영화는 그냥 말없이 그때의 그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장면은 그 후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인터뷰한 다른 어떤 장면보다 깊은 성찰과 감흥, 그리고 충격을 안겨준다. 동산 위에 올라 멀리서 다가오는 쓰나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눈에는 떠내려오는 집과 건물뿐 아니라 아주 조그마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힘에 겨운지 재촉하지 못하고 더딘 걸음을 내딛는다.

아마도 거기에 올라선 사람들의 어머니, 아버지 혹은 조부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는 꿈에도 못꾼다. 그저 자기쪽으로까지는 오지 않게 바랄 뿐이다. 거대 자연의 횡포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지는 사람들과 마을들. 그곳에는 벚꽃나무가 우두커니 제자리를 지키지만 결코 '낭만'은 없다. 어쩌면 버스커 버스커의 노래 제목처럼 '벚꽃 엔딩'이라고 표현해야 될 것 같다.

@IMG@
<두근두근 내인생>을 지은 김애란의 숨겨진 재난 소설 <물속 골리앗>을 보면 홍수로 인해서 첫 슬픔을 맞게 되는 소년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미 아버지를 떠나 보낸 소년은 홍수로 마을이 물에 잠기자 곧 자신과 소년의 어머니 그리고 둘이 살던 집마저 골리앗 같은 물에 넘겨줘야 할 처지에 놓인다. 식량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로 지속되고, 말없이 음식을 넘겨주던 어머니가 멍하게 숨을 거둔다. 집마저 물에 차오르자 소년은 문으로 뗏목을 만들고 죽은 어머니를 실어 홍수가 난 물 위를 항해 하기 시작한다.

남은 건 물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몇몇 집들의 지붕과 쓰레기. 그 모습들이 소년에게 슬픔이라고 생각되어질 즈음, 진정한 슬픔이 그에게 닥친다. 어머니마저 물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다. 홀로 남겨진 소년은 역시 계속해서 물이 차 소년처럼 홀로 남겨진 타워 크레인 위로 올라간다. 크레인 위에 자신이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지만 소년을 맞이하는 것은 쓰레기 가득한 포대일 뿐이다. 소년은 진정으로 홀로 남겨지고, 슬픔이라는 감정도 처음으로, 진정으로 알게 된다.

@IMG@
슬픔이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

쓰나미로 인해서 가족과 친구, 집을 떠나보낸 일본 사람들의 마음이 소년과 같았을 것이다. 오랫동안 마을에서 평안히 살아오던 사람들이 한순간의 쓰나미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잃는다.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선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마음들이 얼마나 공허한 지가 보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을,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순간들을 봐야할 때 그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마저 살려고 바둥바둥할 수도 없었던 몸이었다면 그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영화는 쓰나미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의 그 상처를 위로한다. 그리고 선물처럼 벚꽃 흩날리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선사한다.

낭만도 기적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구조품도 돈도 아니다. 그들은 예전처럼 변함없이 그들 곁을 찾아온 벚꽃을 통해서 희망을 꿈꾼다. 그것이 비록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스스로 안위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더불어 그들의 슬픔도 낙화의 찰나처럼 살며시 그들 곁에서 떠날 것이라고.

@IMG@
뉴스 클립과 인터뷰 등으로 이어지는 40분의 러닝타임은 마치 서정시를 읽는 것처럼 감성적으로 흘러간다. 처음 충격적인 장면이 지나고 나서는 점차 희망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리고 현실은 어쩔 수 없지만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 땅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을 화면에 담으며 치유의 과정을 거쳐나간다.

이웃나라의 현실을 멀리서만 바라봤던 관객들도 이 중편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어느새 그들과 동화됐다는 걸 깨달을 느낄 것이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에서 끝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벚꽃을 바라볼 수 있는 기쁨도, 쓰나미로 인한 살벌한 폐허를 맞이하는 것 모두 자연으로 인한 것이니 더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가지, 이 작품은 우리가 자연과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철학적으로 깊숙이 반성해 보기를 벚꽃이 유유히 떨어지는 순간의 모습처럼 조용히 속삭인다.

덧붙이는 글 제9회 서울환경영화제는 9일부터 15일까지 열리고 있습니다.
서울환경영화제 쓰나미, 벚꽃 그리고 희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6 전주국제영화제 관객평론가 2008 시네마디지털서울 관객심사단 2009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관객심사단 2010 부산국제영화제 시민평론가

이 기자의 최신기사 '물안에서' 이미 죽은 이의 꿈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