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가 조광래 대표팀감독 경질을 8일 공식발표했다. 이날 축구회관에서 열린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에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황 위원장은 "본선까지 가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전날 조광래 감독을 만나 사임을 권유했다"고 말했다.
대한축구협회가 조광래 대표팀감독 경질을 8일 공식발표했다. 이날 축구회관에서 열린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에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황 위원장은 "본선까지 가기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다"며 "전날 조광래 감독을 만나 사임을 권유했다"고 말했다.연합뉴스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7월 부임 이후 남긴 성적은 12승 6무 3패. 기록상으로는 결코 나쁘지 않은 성적임에도 극단적인 선택이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조광래호는 이미 축구협회의 경질 결정이 나오기 전부터 표류하는 대표팀 운영과 부진한 경기력에 대한 불만 여론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화축구 논란

조광래 감독은 처음 지휘봉을 잡자마자 대표팀에 기존 스타일과는 다른 스페인식의 빠른 템포와 패싱게임 위주의 축구를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조광래 감독 부임과 동시에 대표팀의 전술적 스타일이 큰 폭으로 바뀌었고 선수 구성도 대거 물갈이됐다. 전문가들은 남아공월드컵 16강으로 조직력이 완성 단계를 향하여 가고 있던 팀에 갑작스럽게 무리한 변화를 주는데 우려를 표시했다.

선수들도 혼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청용(볼턴)은 조광래 감독의 지도철학에 대하여 농담 삼아 "사실대로 이루어진다면 만화같은 축구"라는 표현을 썼다. 조광래 축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만화축구'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탄생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곧 이상은 좋지만, 정작 현실과는 괴리된 축구에 대한 잠재적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조광래호는 결국 만화축구의 완성을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아시안컵 우승 실패

한국축구대표팀은 2010년 1월 '왕의 귀환'을 표방하며 51년만의 아시안컵 정상 도전에 나섰다. 조광래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처음으로 나선 국제대회였다. 대표팀은 호주, 이란 등 아시아 강팀들을 상대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4강에 오르는데 성공했지만 준결승에서 일본의 벽에 막혀 승부차기 끝에 분패했다. 이 과정에서 조광래호는 겉보기에 화려한 패싱게임에 비하여 골결정력 부족과 후반 체력저하로 전술적 효율성 면에서 도마에 올랐다.

조광래 감독의 '경험 부족'에 대한 논란도 두드러졌다. 사실상 8강행을 확정지은 상황에서 선수들의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던 인도전에 무리하게 주전들을 투입한 것이나, 호주전에서 벌어진 유병수의 재교체 해프닝과 항명 파문은 조광래 감독의 리더십과 선수 관리능력에 큰 상처를 남겼다. 허정무호 시절 팀의 주축이었던 박지성-이청용은 아시안컵에서 단 한 개의 공격포인트도 기록하지 못하며 선수활용 능력에 의문 부호를 자아냈고, 승부차기에서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들로 키커를 구성한 용병술도 비판을 피해가지 못했다. K리그 감독으로는 베테랑이었지만 국제무대에서는 '초짜'에 불과했던 조광래 감독의 미숙함를 드러낸 장면이었다.

이영표·박지성 은퇴 선언

조광래 감독은 아시안컵 이후 커다란 전력누수에 봉착하게 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이후 9년간 국가대표팀의 중추로 활약해왔던 주장 박지성과 베테랑 이영표가 아시안컵을 끝으로 나란히 대표팀 은퇴를 선언한 것. 한일월드컵 직후 황선홍과 홍명보의 동반 은퇴로 히딩크 감독에 이어 지휘봉을 잡은 지도자들이 한동안 고심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있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이 더욱 불운했던 것은 황선홍-홍명보와 달리 박지성은 아직 선수로서 한창 뛸 수 있는 나이에 부득이하게 은퇴를 선언했다는 점.

조광래 감독은 마지막까지 이들의 대표팀 은퇴를 만류했지만 결심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이후 조광래호는 지난 1년간 김영권, 홍철, 김보경, 지동원 등 다양한 선수들을 테스트하거나 전술변화를 통하여 이들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하여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끝까지 기대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한일전 징크스

 조광래 감독.
조광래 감독.KFA

조광래 감독은 "현역시절 한 번도 일본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대표팀 감독으로서 그의 커리어에 가장 치명상을 안긴 상대가 바로 일본이었다.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일본을 상대로 아시안컵 승부차기 포함 2무 1패로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했다. 특히 치명타를 안긴 것은 지난 8월 10일 한일전이었다.

이전까지 A매치 9승 4무 1패로 비교적 순항하던 조광래호는 삿포로 원정에서 0-3의 충격적인 완패를 당하며 크게 요동쳤다. 1974년 이후 처음으로 당한 세 골 차 패배였고 광복절을 불과 닷새 남겨둔 상황이었기에 심리적 충격은 더욱 컸다. 이날 경기는 브라질월드컵 예선전을 코앞에 둔 마지막 평가전이기도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던 유럽파에 대한 맹신, 무리한 포지션 파괴의 부작용, 홈과 원정의 경기력 편차 등 그간 잠재되었던 조광래호의 불안한 요소가 이 경기를 통하여 한꺼번에 분출되며 어두운 미래를 암시한 장면이었다.

선수차출 논란과 기술위와의 갈등

조광래 감독은 임기 내내 외부의 적은 물론이고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브라질월드컵 예선을 앞두고 세대교체를 추진하던 조광래 감독은 핵심선수 차출문제를 놓고 올림픽 및 청소년대표팀과 갈등을 빚었고, 이를 중재하려던 이회택 전 기술위원장과 선수선발 권한 문제를 둘러싸고 공개적으로 대립하기도 했다. 조광래 감독은 기술위원회가 제역할을 하지못하고 있으며 내내 강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또한 조광래 감독은 선수차출을 둘러싸고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유독 잦은 불협화음에 휩쓸렸다. 전남과의 임의탈퇴 파문에 휩싸였던 이천수의 대표팀 복귀를 검토하다가 여론에 막혀 백지화되었고, 폴란드-레바논과의 2연전에서는 공격수 이동국-손흥민의 차출과 활용문제로 논란에 직면하기도 했다. 해외파도 기성용의 합류문제를 놓고 닐 레넌 셀틱 감독이 대표팀의 무리한 차출에 반발하는 사건도 있었다. 유럽파들은 장거리 이동에 따른 체력적 부담과 혹사, 일방적인 편애 논란을 피해가지 못했고, 국내파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유럽파에 비하여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조감독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레바논전 패배- 무리한 실험, 그리고 선수탓

조광래 감독이 경질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지난 11월 레바논과의 원정경기(1-2) 패배다. 이날 대표팀은 단순히 한경기 패배로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극도의 부진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단순히 선수들의 부진을 넘어 조광래 축구의 아킬레스건이 모두 집대성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중동축구를 비롯하여 상대팀에 대한 맞춤형 전술의 부재, 제 포지션이 아닌 자리에 선수들의 무리한 기용, 비효율적인 움직임에 따른 후반 체력 저하 등의 문제점이 그대로 반복됐다.

또한 조광래 감독이 레바논전 이후 더큰 비난 여론에 직면하게된 계기는, 패배를 스스로의 탓으로 인정하기보다 '외부 요인'에서만 찾으려고하는 면피성 태도에 있었다. 조광래 감독은 경기 직후 '1진과 2진의 실력차가 컸다' '심판 배정과 판정에 문제가 있었다' '잔디상태가 좋지않았다'며 핑계를 찾기에만 급급했고, 스스로의 준비부족과 전술적 문제에 대한 자성은 1%도 언급하지 않았다. 조광래식 만화축구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팬들의 시선은 이날 인터뷰를 계기로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민심이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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