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단체 관중들의 '자리 선점'은 야구장의 오랜 고질병이다.

일부 단체 관중들의 '자리 선점'은 야구장의 오랜 고질병이다. ⓒ 양형석


밥 보다 야구를 더 좋아하는 직장인 윤아무개(30)씨는 2008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6차전이 열렸던 지난 23일, 월차를 내고 들뜬 마음으로 야구장을 찾았다.

바쁜 업무에 쫓겨 인터넷 예매를 하지 못했지만, 윤씨는 그리 어렵지 않게 '일반석'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전날부터 내린 비의 영향으로 현장 구매를 하러 온 관중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입장했지만, '로얄석'이라 할 수 있는 응원 단상 앞자리는 이미 열성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 윤씨는 조금 뒤쪽으로 가서 아직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곧 유니폼을 입은 한 아리따운 여성이 윤씨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헉,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야구장 헌팅이란 말인가?'

건강한 미혼 남성 윤씨의 심장 박동은 '쌕쌕이' 이종욱의 걸음만큼이나 빨라졌다. 윤씨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정중하게 "네, 무슨 일이시죠?"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그 여성의 한 마디는 윤씨를 좌절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저씨, 여기 자리 있거든요. 제가 맡아놓은 자리에요."

야구장의 고질병, '자리 선점 만행'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려 했지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오히려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다.

'나름대로' 예의를 지키려 했지만,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은 오히려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다. ⓒ 양형석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이 '아저씨' 소리를 들은 것도 충분히 화가 날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욱 열 받는 일은 윤씨가 앉았던 자리의 주변이 텅 비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 야구장 관중석의 고질병인 '자리 선점 만행'이었다.

야구장에는 각계각층에서 단체 응원을 오는 경우가 많다. 포스트 시즌과 같은 큰 경기 때는 더욱 그렇다. 한 구단에만도 인터넷 팬 카페가 수십 개가 넘고, 각종 기업에서 회식을 겸해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그러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두 경기 3~4시간 전부터 모일 순 없으니 총대를 멘 '대표 선수' 몇몇이 100석이 훨씬 넘는 자리를 선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즐거워야 할 야구장에서 같은 팀을 응원하는 관중들끼리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윤씨는 끓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참아내고 다른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예 테이프로 한 구역을 모두 막아 놓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자리를 이용해 주세요'라고 '나름대로' 예의 있게 메모를 써 붙여 놓은 곳도 있지만, 뻔히 빈자리를 보고도 점점 나쁜 자리로 쫓겨나는 윤씨의 마음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윤씨는 잠실 야구장 내야석 가장 먼 곳에서 경기를 관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애국가를 부른 인기 그룹 '소녀시대'의 어여쁜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서 말이다.

"우리 모임을 위해"... 치졸한 '집단 이기주의'

집이 멀어 경기장에 늦게 도착하는 친구를 위해, 혹은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경기장으로 달려오는 가족을 위해 한두 자리 정도 맡아 놓는 것은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모임이 좋은 자리에서 관람하기 위해 몇몇 사람들이 수백 개의 좌석을 선점하는 것은, 모임에서는 '숭고한 희생'일지 모르지만, 다른 관중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는 치졸한 '집단 이기주의'일 뿐이다.

얼마 전, 유명 오락프로그램인 <1박2일>에서 사직구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제작진은 50개가 넘는 좌석을 선점하며 관중들에게 불편을 줬고, 그 일로 인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아 다니며 무공해 웃음을 전달하던 <1박2일>은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었다.

미리 지정된 좌석을 확보했던 <1박2일> 팀도 그렇게 욕을 먹었는데, 일부 단체들은 '선착순'으로 앉아야 하는 '일반석'을 선점해 놓고도 오히려 당당하다. 

아마 이들은 오는 26일부터 열리는 한국시리즈에서도 수백 석을 선점하고 뻔뻔한 표정으로 뻔뻔하게 다른 관중들의 접근을 원천 봉쇄할 것이다. 바로 그런 행동이 같은 팀을 응원하는 팬들의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일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그렇게까지 단체 응원이 하고 싶으면, 차라리 대형 TV가 설치된 넓은 호프집을 찾으라고. 아, 거기선 또 늦게 오는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기 위해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한 맥주를 선점하려나?

야구 자리 선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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