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비치 주립대의 에이스 최용희의 화려한 입단 |
▲ 삼성이 야심차게 영입을 했던 최용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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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겨울 한국시리즈 우승에 한이 맺혔던 삼성 라이온즈는 미국 대학무대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줬던 재미교포 투수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다. 삼성을 사로잡았던 그 투수는 롱비치 주립대의 에이스 다니엘 최(Daniel Choi 한국명: 최용희)였다.
1993년 미국의 4대 대학리그 중 하나인 '빅 웨스턴 컨퍼러스'에서 롱비치를 4강에 올려놓았던 최용희는 대학 재학 시절 20경기에서 17승 2패 평균자책점 2.47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며 그 해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투수였다. 17승은 롱비치 주립대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롱비치 주립대는 메이저리그 스타인 제이슨 지암비와 스티븐 트락셀 등을 배출한 야구명문 대학이다. LA 에인절스의 신예투수 제러드 위버 역시 롱비치 주립대 출신이다. 제러드 위버는 대학 재학시절 15승 1패를 기록하며 최용희에 이어 롱비치 주립대 명예의 전당 다승 2위에 올라있다.
최용희는 4학년이던 1993년 메이저리그에 도전을 했지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기대보다 턱없이 낮은 하위라운드(15라운드 전체 433순위)에 자신을 지명하자 이에 실망하고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용희에게는 아쉬운 순간이었지만 삼성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삼성은 최용희를 국내로 데려오기 위해서 4억원이라는 1993년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금액을 안겨주며 입단 계약을 체결한다. 당시 프로야구 신인 최고 계약금은 1993년 LG의 이상훈이 받은 1억 8천800만원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미국에 스카우트 한번 파견을 안 하고 단지 최용희가 거둔 승수와 방어율 그리고 145km/h가 넘는 패스트볼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만으로 최용희와 계약했다. 삼성이 최용희의 투구 모습을 확인한 것은 비디오테이프 한 장이 전부였다. 최용희의 부친이 직접 건네준 비디오테이프였다.
적응에 실패한 최용희 그리고 눈물 젖은 삼겹살4억이라는 대박 계약으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최용희에 대한 기대감은 실로 엄청났다. 최용희 역시 대단한 자신감을 나타냈지만 구속이 145km/h를 넘나든다고 했던 최용희는 실제로는 135km/h도 넘기지를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용희는 하와이 전지훈련 도중에 어깨 부상까지 당한다.
부상에서 회복한 최용희는 1994년 프로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1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5.48이라는 참담한 기록을 남긴 채 부상이 재발해 2군으로 내려가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부상을 당한 최용희는 구단에서 대구에 숙소로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대구 둔치로 매일같이 훈련을 나가 재활의 의지를 보이며 구슬땀을 흘렸다. 러닝과 기초 체력 훈련 등의 운동을 하고 난 후 최용희가 둔치에서 한 일은 삼겹살 두 근을 구워먹는 거였다.
미국에서 자란 최용희는 한국 음식 적응에 완벽하게 실패했다. 지금처럼 용병제도가 있어서 용병의 입맛을 고려한 식단을 따로 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은 성적을 거두며 당당히 구단 측에 입맛에 맞는 음식을 요구할 입장도 아니었던 최용희는 결국 입에 맞지 않는 한국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결국 음식 적응에 실패를 한 최용희는 이 부분이 체력을 떨어뜨려 자신의 부진에 큰 몫을 했다고 느끼고 한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그나마 입맛에 맞는 삼겹살을 체력 보강용으로 먹게 된 것이다.
그러나 상추나 고추장, 김치는 물론 밥도 없이 오로지 삼겹살만 구워먹는 이 덩치 좋은 젊은이는 둔치로 운동을 나오거나 산책을 나온 대구 시민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홀로 야외에 나가서 삼겹살을 구워먹는다는 것이 그다지 흔치 않은 일이기도 하였거니와(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리라) 그 주인공이 삼성의 부진에 큰 몫을 한 장본인 최용희라는 것을 대구 시민들이 알아챘기 때문이다.
팬들은 분통이 터졌다. 4억이라는 거액을 주고 데려온 투수가 몇 게임 던지지도 못하고 전력에서 이탈한 것도 그렇지만 당시 삼성의 성적이 포스트 시즌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안 좋았는데 지금 그 장본인이 한가롭게 둔치에서 바비큐 파티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으니 화가 안날 수가 없었다.
이내 주위에서 손가락질과 욕설, 야유가 시작되었지만 최용희는 묵묵히 자신의 성공적인 재활을 위해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삼겹살 두 근을 꿋꿋하게 먹었다. 다행히 당시 소문을 들은 모 스포츠지에 의해 '최용희와 삼겹살'에 얽힌 일화가 기사화되면서 오해는 연민(?)으로 바뀌게 되었고 삼겹살에 얽힌 해프닝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최용희는 결국 재기하지 못했다. 최용희의 부진과 맞물려 우승을 노렸던 삼성 역시 포스트 시즌에도 올라가지 못하는 역대 최악의 부진을 겪게 된다. 최용희의 고국무대 도전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으며 삼성의 우승 꿈도 그렇게 끝이 났다.
1996년 결국 삼성에서 방출된 최용희는 OB 베어스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쓸쓸히 미국으로 돌아갔다. 최용희 영입을 주도했던 김홍민 사장 역시 문책을 받고 구단을 떠나야 했다.
최용희 스카우트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삼성은 1995년 이광진 사장과 김종만 스카우트부장까지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필라델피아 필리스 산하 싱글 A팀인 바타비아 클리퍼스에서 뛰고 있던 최창양을 스카우트하는데 성공을 한다. 당시 최창양에게 삼성이 안겨준 금액은 프로야구 신인 계약 사상 역대 최고액인 계약금 5억원에 연봉 4000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