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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출근시간에 맞추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어왔건만 지하철 문은 아멸차게 '쾅' 하고 닫혀버렸다. 에잇, 젠장.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 밑엔 다크 서클이 생기고 뭔가를 그리워하는 듯한 표정의 남자가 서 있다. 그도 나처럼 맥이 풀린 모양이다. 변신술을 유지하기 위해 드링크제를 손에 들고 있는 걸 보니, 나와 같은 변신 너구리 족속이렷다. 내 고향 지키기 분투기 그때가 언제던가. 그러니까 폼포코 31년, 도쿄 뉴타운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우리 너구리들의 보금자리인 숲과 산을 깡그리 없애버린 인간들을 연구하기 위한 '인간 연구 5개년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 그 때. 그 뒤 우리 너구리들은 변신 가능한 너구리와 변신력 없는 너구리로 분파되어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나처럼 변신 가능한 너구리는 인간 세계에 들어와 원래 태생이 너구리였는지 인간이었는지 추억해 볼 시간도 없이 샐러리맨의 일상에 지쳐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차에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을 보게 됐다.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지만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영화감독 역시 우리 같은 변신 너구리 족임이 분명하다. 내부 너구리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을 숨은 이야기들을 영화 속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우리 너구리들의 비겁함과 나약함을 잘 알고 있는 나를 너무도 민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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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나온 대로 우리 너구리들은 원래 두 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지혜로운 할머니 너구리는 "우리 숲을 인간에게 빼앗기는 마당에 내분이라니 말도 안 된다"라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분간 자손을 만들지 말고 거주지를 충분히 확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양식을 최대한 아껴서 일단 생존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에 두 손 들다 그때부터 우리는 '인간 연구 5개년 프로젝트'를 세워 어떻게 하면 인간들이 도쿄 뉴타운 개발에서 손을 뗄 수 있을 것인가를 궁리했다. 이때 시작된 것이 바로 선대부터 내려오던 '변신술'이었다. 학습에 충실하고 타고난 자질이 있었던 나와 같은 너구리는 끊임없는 연구와 실습 끝에 마침내 변신술을 익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들을 놀래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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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기억할 것이다. 도쿄 뉴타운이 세워질 무렵에 발생한 각종 귀신 사건들을….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곳이 원래 무덤 자리여서 그렇다는 둥 호들갑을 떨었는가 하면, 심지어 그곳 놀이공원 사장은 자신들이 홍보용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떠벌렸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모조리 우리 너구리들의 '작품'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 너구리들처럼 인간들의 개발 계획에 떠밀려 멸종 위기에 이른 여우들이 인간의 놀이공원에 취직해 연명하고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정말 가관이다. 이 여우들은 심지어 우리 장로 중 한 사람을 꼬드겨서 너구리들도 이 놀이공원에 취직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 욕할 입장도 아니다. 우리 너구리들이 여우들보다 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변신술로 인간들을 놀라게 해도 개발과 함께 '인해전술'식으로 밀고 들어오는 인간들을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인간에 지친 우리 너구리들은 어느 순간, 더 이상 자발적으로 나서 용기 있게 싸우려 들지도 않았다(영화에서 묘사되었던 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이런저런 말들을 엄청 떠벌이다가도 막상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대목에 와서는 다들 눈길을 피하고 침묵 모드에 접어들지 않는가). 심지어 회의 막판에 인간들의 간식인 맥도날드 햄버거가 나오자, 체면이고 뭐고 없이 개떼처럼 달려들어 먹어치우는 모습이란…. 나는 인간과 닮은 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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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구 5개년 프로젝트' 결과, 인간과 너구리는 정말 닮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앞서 말했듯이 말만 앞선다는 것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것도 똑같다. 우리 너구리들은 노래하며 싸우고 노래로 화해한다. 오죽하면 우리가 배를 두드릴 때 나는 소리인 '폼포코'로 한 해 한 해를 명명했겠나. TV를 좋아하는 것도, 드링크제나 맥도날드 음식에 환장하는 것도 똑같다. 성욕을 잘 억제하지 못 하는 것도 정말 흡사하다. 일찍이 할머니 너구리가 엄하게 '긴축 섹스'를 명하셨을 때 암컷 너구리들은 '들이대는' 수컷 너구리들 때문에 고생깨나 했을 것이다(물론 나도 그 수컷 무리 중 한 마리였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 우리가 우리 삶의 터전을 인간들에게 내주었던 것은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산아정책에 실패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 인간과 같이 한 번 살아보자'라는 공생 의지를 가졌다. 그러나 인간들은 의논은커녕 통고 한 마디 없이 찾아와 자기들 마음대로 길을 닦고 집을 지었다. 그 과정에서 늘 다니는 길이라 별 생각 없이 지나던 우리 너구리들이 쌩쌩 달리는 자동차에 치여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우리의 과거가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아는가 그 옛날 장대했던 우리의 마지막 집단 변신술을 떠올려본다. 어떠한 변신술로도 인간들의 개발 탐닉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모두 힘을 합쳐 이미 80% 이상 인간들에게 먹혀 버린 뉴타운 지역을 옛날 모습으로 다시 되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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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자란 아름드리나무와 달구지 덜컹대며 지나가는 시골길, 푸르다 못해 검은 숲, 그 숲에 둥지를 튼 새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우리가 되돌려 놓은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통곡했던가. 결국, 우리는 패배했다. 인간은 점점 많은 땅을 점유해가고 있으며 이 흉흉한 인간 세상에서 적자만이 생존한다. 하지만 인간들아, 너희들에게도 언젠가 나처럼 눈물 흘릴 날이 올 것이다. 내 눈에는 변신 너구리뿐만 아니라 변신 여우, 변신 올빼미들이 보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가만히 속으로 중얼거린다. "살아 남으십시오. 이 겁 없고 무례한 인간 족속들은 반드시 자멸할 겁니다. 우리 그때 다시 노래하고 춤춰봅시다"라고. 오늘도 나는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우리 너구리 족들이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곳에 가서 휴식을 얻는다. 내일 하루를 버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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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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