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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정 작은 조카의 군 입대를 앞두고 가족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인사를 나눌 때였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손자를 가슴에 안아주셨는데, 키 큰 손자에 비해 그 몸피가 어찌나 작으신지 옆에 선 내가 괜히 콧등이 시큰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밤이고 낮이고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 준비를 하던 그 모습 그대로 계실 것만 같았던 부모님이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지고 이제 어쩔 수 없는 '노인'이 되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늘 가슴이 아프다. 여기에 더해 당신이 낳은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고 돌봐드려야 하는 자식의 속은 속이 아닐 것이다.

치매가 막 시작된 어머니를 모시고 틈만 나면 여기 저기 여행을 다니는 후배에게 어머니께 정성껏 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하니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 잘 하는 거 아니에요. 옛날에 엄마한테 정말 못된 딸이었거든요. 이담에 우리 엄마 돌아가시면 엄청 후회할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만큼이라도 하는지 몰라요."

<다섯 살배기 딸이 된 엄마>의 저자 신희철씨 역시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며 '엄마에 대한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며 어머니의 치매가 오히려 "엄마가 돌아가시더라도 울며불며 후회하는 자식이 되지 않도록 기회를 마련해 준 셈"이라고 이야기한다.

알뜰하고도 억척스럽게 6남매를 키워내신 엄마. 자식들이 아무리 용돈을 드려도 아끼느라 택시 한 번 타지 않으시던 엄마. 예순 여덟에 시작한 입장료 천 원짜리 무도장 출입이 마냥 행복했던 엄마. 그러나 이제 엄마는 온몸이 굳어가는 파킨슨병과 치매에 걸려 때로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변도 가리지 못할 때가 있으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셨다.

대기업에 다니며 미혼으로 엄마와 함께 살았던 저자는 직장 생활과 엄마를 돌보는 일 두 가지를 병행하다가 결국 엄마를 돌보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기에 이른다. 이쯤 되면 다들 한 마디씩 할 법하다.

"대단하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할 거야" "20년 다닌 직장이 아깝다. 차라리 돈을 주고 사람을 쓰지…" "시집을 안 갔으니 그것도 가능하지. 남편 있고 시댁 식구들 있었으면 가능하겠어?"

마흔이 되도록 철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그러나 엄마와 24시간 생활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깨닫는다. 엄마를 위한 이 시간이 결국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것을.

그동안 엄마가 성인으로서 지니고 있던 생각과 행동, 판단과 습관을 차례로 버리면서 아기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딸은 엄마를 자신의 아기로 생각하고 그 순수함에 웃고 울며 감동을 받는다. 아기로 인해 얻는 부모의 기쁨을 고스란히 체험하는 것이다.

딸도 못 알아보고, 아무 데나 오줌을 싸기도 하고, 고집불통에,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엄마를 돌보며 짜증을 내거나 화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감사하며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에 감격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심청에 버금가는 효녀이거나 남달리 헌신적인 사람, 아니면 '천사표'여서일까? 다행히 그렇진 않다. 그 덕분에 책읽기가 즐거우며 또한 가슴을 울린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란 딸로서 그 사랑을 확인하고 아기가 돼버린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품에 안았기에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니 나에게도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을 보고 있다가 주스를 들고 가서 '이거 마시고 하세요'하는 엄마, 강아지 복순이를 아기로 생각해 등에 업혀달라고 조르는 엄마, 저자는 이 모든 엄마의 행동과 말과 감정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낸다. 다름 아닌 그 점이 바로 특별하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미덕은 솔직함에 있다. 엄마와의 사소한 일상은 물론 무도장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엄마의 남자 친구 이야기, 엄마의 간호와 수발을 둘러싼 형제 자매간의 갈등과 눈물, 어려움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어 이 일이 어느 한 집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미덕은 읽는 즐거움이다. 치매 가족의 수기가 가진 우울함과 어두움, 심각한 병의 진행, 끝이 보이지 않는 수발 등을 한 발짝 넘어 적절하게 배치된 엄마와 딸의 일상과 소소한 에피소드가 재미있어 지루한 줄 모르고 읽게 된다. 저자의 글 솜씨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치매 엄마와 재미있게 사는 법' 같은 것은 자신의 절절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그 어느 치매 환자 간호 지침보다 훌륭하다.

치매 환자와 그 가족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에서 나온다고 저자는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지금 내 부모를 그렇게 모시지 못한다 해도 실망하지는 말자. 가족의 사랑에서 나오는 안정이 치매 환자를 비롯한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명약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어도 조금은 나아질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다섯 살배기 딸이 된 엄마> 신희철 지음 / 창해, 2005)


다섯 살배기 딸이 된 엄마

신희철 지음, 창해(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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