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좌절, 심적 고통, 무기력, 비애, 원한, 적의, 분노, 앙심, 복수심, 상실의 두려움. 일련의 심리상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질투가 잉태하는 것들입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 살로비(P.Salovey) 박사는 미국의 범죄행위 중 20%가 질투 때문이라 주장합니다. 또한 <질투의 임상학> 을 저술한 화이트(G.White) 박사는 이혼한 부부의 30%가 질투 때문에 갈라선다고도 하네요.

 영화 <질투는 나의 힘> 포스터
ⓒ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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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질투. 정말로 무섭죠. 수많은 여신들과 님프, 인간 여인네들을 넘보았던 바랑둥이 신 제우스와 결혼한 헤라는 결국 자신의 소중한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제우스와 관계를 가진 이들에게 복수를 가했습니다. 질투심이 빚어낸 숙청이였죠.

질투의 대부분은 열등감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질투의 대상은 바로 주변의 인물들이거나 동종의 직업이나 목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슈퍼마켓주인이 대단위 할인점 사장을 질투할 수는 있어도, 어부가 농부를 질투하지는 않으니까요.

화가 나거나 흥분하면 뇌에서 신경물질인 아드레날린이 급속하게 분비됩니다. 너무나 열 받고 복수심에 불이 타 그 분비되는 소리가 방 안의 탁상시계 초침소리보다 크게 들리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질투를 강하게 느끼는 열등자가 모두 야비한 방법을 동원한 복수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 이원상( 박해일 분)이 딱 그러한 인물입니다. 그는 모짜르트에 대한 질투심으로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모략을 결심하는 살리에리 만큼의 용기도 없이 자신의 연적인 한윤식(문성근 분)의 주변에만 맴돌고 맙니다.

그가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아예 복수의 칼도 갈지 못하는 이유는 윤식에 대한 동경과 선망의 마음이 분노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질투라는 것이 원래 자신의 무능력에 반한 타인의 능력에 대한 시기심이기 때문에 원상의 그런 행동이 결코 이상한 법도 아닌 것 같네요.

이런 질투도 있잖아요?
평소 자신과 비슷하거나 혹은 못나다고 생각한 이가 갑자기 어떤 주목을 받거나 입신양명을 했을 때 정말 화가 나는 감정. 이런 경우에는 복수 혹은 딴지가 쉬운 편이죠. 그런데, 원상이 바라본 윤식은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부유한 환경과 지적 능력 게다가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로움과 매력적인 로맨티스트의 감성까지. 그에게는 윤식이 ‘같지 않은 놈’이 아닌 ‘대단한 놈’ 이였으니까요.

영화는 삼각관계구도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내용이해와 흥미진작을 위해 흔히들 시도하였던 카메라의 빠른 이동, 적절한 효과음 혹은 독백적 내레이션을 배제시켰습니다. 그래서 감상의 의식 속에 편안하고 익숙하게 자리잡았던 남녀로맨스를 기대하였던 관객들에게는 무척 따분하고 드라이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전반 30분이 지나고 나머지 1시간 30여분 동안 관객석 곳곳에서 고로쇠 나무의 수액처럼, 많지는 않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는 웃음소리가 이어집니다.

그 웃음의 연유는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연기가 픽션이기보다는 관객들의 일상을 마치 흉내내는 듯한 페르소나적 동질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상의 경험들 있잖아요? 한가한 공휴일 오후. 눈꼽을 제거하지 않은 부시시한 얼굴에 헐렁한 츄리닝 차림으로 재탕드라마가 방영되는 TV를 앞에 두고, 발톱을 깍는 중에 걸러 온 친구의 전화. 친구 딴에는 심각하지만, 그의 진부하고도 고루한 사랑이야기를 발톱을 깍으면서 대수롭지 않게 들어주다가 ‘아 나두 그랬지’ 하며 ‘피식’ 웃음을 털어내는.. 바로 그 때의 웃음 말이죠.

이런 류의 작위적이지 않은 일상의 체취를 섬세하고 재치있게 필름에 담아낸 영화 <질투의 나의 힘>의 문법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데자부(Dejavu)를 자아냅니다.

그렇습니다. 그 데자부의 발견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이네요. 임어당의 저서 제목과 기형도의 시 제목을 차용한 방식 그리고 각 영화 속에 심어놓은 한 권의 수준(?) 있는 책의 언급까지도 홍상수와 박찬옥이 동종일 것이란 혐의를 짙게 하고 있지요(박찬옥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의 조감독).

그렇지만 그 동종의 DNA는 원조와 짝퉁으로 나뉘어지는 우열이 아니라 백반 반찬 속의 김치와 깍두기처럼 나름대로의 맛을 간직한 동종의 세트메뉴라는 것이죠.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기자 인터뷰에서 “홍 감독과 박 감독은 모두 감성이 예민한데 인물에 대해 홍 감독은 자기혐오, 박 감독은 예쁘게 호기심을 갖고 접근한다. 홍 감독의 인물은 동물적인 반면 박 감독의 인물은 미워할 수 없다. 그런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라고 말한 것처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느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의 시에서 나타내는 질투는 자학적 무기력에 가깝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원상 또한 그러한 자학적 무기력을 영화의 종반부까지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2시간 조금 넘은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도 한때 그(원상)처럼 자학적이였고, 무기력했었지. 아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그리고 제가 알고 있는, 타인들은 물론이고 자신조차 사랑하지 않은 또 다른 원상들이 빨리 자기 사랑을 깨우치기도 바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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