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꼬박 4년을 기다렸다. 설경구가 건들거리며 문소리와 사랑에 빠질 때도, 차승원이 숟가락 하나로 교도소를 탈출해 '분홍의 립스틱'을 불러제낄 때도, 송강호가 덜 떨어진 선비로 나와 베쓰볼을 할 때도, '당신의 아내로 죽는 것 괜찮습니까?'하고 묻는 장백지 덕분에 착한 눈물을 흘리는 최민식을 보며 덩달아 울 때도 내 마음은 일편단심 민들레였다. 연기력으로 마음을 흔드는 남자 배우들이 스크린에 수없이 나타나도 내가 극장에서 가장 만나고 싶은 배우는 오로지 한석규였으며,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영화는 그가 선택해 출연한 영화였다.

몇 번인가 시나리오 검토가 끝나고 곧 영화에 출연할 거라던 소문만 무성하게 일어났다가 사라진 다음, 영화 <이중간첩>의 로케이션을 위해 프라하로 날아간 한석규를 봤다. 그 때부터 날짜 꼽으며 기다린 것이 바로 이 영화 <이중간첩>이다.

개봉일이 정해지자마자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고, 드디어 오늘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개봉일이라 더 그랬겠지만, 극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고 로비에서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은 기대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느냐고? 그가 너무 오래 쉰 것이 아닌가 하는 장탄식을 나도 모르게 뱉고 말았다면, 답이 되겠는지…. 영화를 함께 본 친구가 말했다. "야, 한석규 시나리오 보는 눈도 다 된 모양이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이중간첩> 홈페이지에 가서 게시판에 올려진 비판글들을 보고 난 지금, 한석규의 팬으로서 안타깝다. 너무 길게 쉬면 안 될 것 같다는 조급증이 이 모자란 시나리오를 그냥 용인하게 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영화 <이중간첩>은 일본에서 찍은 다큐멘터리에 한석규를 집어넣어 제작했다는, 1979년의 노동당 창건 기념 사열 장면으로 시작한다. 쬐금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면 기술적으로 훌륭하다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한석규의 결연한 눈빛을 다시 만난 기쁨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위장귀순을 하고 국정원에서 일하며 북의 정보를 흘려 주면서 믿음을 얻은 한석규, 아니 림병호는 고정간첩 윤수미(고소영)를 만나면서 남한에서 간첩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다, 북과 남에서 동시에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 둘은 남도 북도 아닌 곳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필연성이 받쳐 주지 못하는 억지 진행에 관객들이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난 인민의 총탄이 되려는 각오로 내려온 사람"이라며 윤수미를 다그치던 림병호가 불과 얼마 뒤에는 이념도 버리고 체제도 버리고, 북에 남은 가족까지 모른 척 하면서 일신의 안전만 생각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물론, 사랑을 느낀 여자에게 "희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장면에서, 인간적인 고뇌에 빠진 한 남자의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는 바 아니지만, 영화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가 그렇게 급격하게 변해야 했던 데에는 림병호가 배신했다고 믿는 북쪽과 자신을 남한 간첩 행동책으로 넣어 조직 사건을 만들어 놓은 남쪽의 비정함이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위장귀순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그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조금도 굽히지 않았던 강인한 신념이 무너질 만큼의 강력한 동기였던가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극의 흐름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갖가지 장치들 때문이겠지. 여자 주인공의 연기력이 너무 약하다는 것도 원인일 것 같다.


림병호가 윤수미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념을 포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두 사람의 눈빛은 충분히 절절하지 못하고, 윤수미를 통해 체제의 비정함을 알아 버렸다고 생각하기에 목욕탕에서 보여 준 두 사람의 대치 장면이 너무 약하다.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어야 할 장면, 그러니까 당을 배신해 가면서까지 "당신이 죽는 게 싫었어요"라며 림병호를 지키고자 했던 애틋함이 제대로 전달되지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이 아, 저 순간엔 저런 감정이겠구나, 하고 '해석'해야만 하는 번거로움까지 안겨 준다.

프라하 로케이션에서 한석규가, "심은하가 영화계에 복귀할 마음만 있다면, 돌아올 수 있게 돕고 싶다"고 하던 마음의 저 깊은 곳에는, 혹시 고소영에 대한 답답함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석규는 역시 한석규였다. 그런 갖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혼자서 이 영화를 버팅기는 힘이었음은 분명하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체제와 이데올로기에 염증을 느끼고 제3국으로 가는 배 위에서 자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중간첩>의 림병호는 자기가 본 희망을 솔직하게 누리고 싶어 제3국으로 향했다.

림병호라는 인물에 한석규의 색깔을 입히고, 영화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한 것은 그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 결말이 비록 불행이었다 해도, 체제와 이념의 문제를 온전히 개인의 선택으로 귀결지어버린 결론이 비록 많은 문제를 던져 준다고는 해도, 이 영화 속에서 그의 존재는 빛난다. 정보국장 역을 맡은 천호진과 고정간첩 역을 맡은 송재호가 강렬한 카리스마로 이 영화의 빈 고리들을 메워 주고 있는 것도 커다란 미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로 한석규를 변명해 보고자 애를 쓰는 나도 참…. 어쨌든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더 많이 준비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남한에 고정간첩이 5만 명이나 있다고 떠벌이던 김흥도 목사 같은 이들에게 혹시나 이 영화가 이용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북파 간첩의 존재나 귀순자들에 대한 고문과 정신교육 따위 공공연한 비밀을 풀어 놓은 영화이니만큼 그 반대 급부 역시 생가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워낙 이상한 방향으로 비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영화 보는 동안 이런 턱없는 기우까지 생겨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설마, 그러기야 할라고?
2003-01-25 10:1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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