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잠시 '슬래시 무비'라는 공포영화 장르가 유행한 적이 있지만, 그야말로 유행으로 끝나버렸다. 슬래시 무비들은 "이렇게 놀라게 하려고 그랬지"라며 기존 공포영화들을 조롱하고 관객들의 생각을 미리 읽는 기민함으로 반짝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슬래시 무비는 역설적으로 스스로 거리를 뒀던 공포 영화의 공식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짧은 생명을 마쳐야 했다. 슬래시 무비들은 인간이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더욱 강렬한 공포를 느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값싼 반전과 유혈극을 남발해 스스로의 생명을 소진시켰다. 공포영화로 시작해 스릴러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영화 '디 어더스(The Others)'는 99년의 '식스 센스' 이후 가장 충격적인 반전을 제공한다. 여름 시즌 막바지에 본 '디 어더스(The Others)'는 '뜻밖의 보석'이었다. 영화는 2차대전이 막 끝난 영국 남부 해안의 어느 음침한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 저택에는 1년 반전에 전장에 나가 아직껏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와 그녀의 두 아이들이 살고 있다. 그레이스의 아이들은 햇볕에 노출되면 죽을 수 있는 극도의 알레르기(allergy)를 앓고 있는 데 집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갑자기 사라져버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어느 날 "예전에 저택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3명의 새로운 하인, 유모와 벙어리 하녀, 정원사가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를 찾아온다.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는 새로 온 하인들에게 몇 가지 기괴한 저택의 규칙을 일러준다. 집안의 50개의 문들 중 한 문이 잠기고 나서야 다른 문이 열릴 수 있다. 항상 커튼이 쳐져 있어야 하고, 실내 조명도 책을 간신히 읽을 수 있을 정도만 허용된다. 그레이스는 이 모든 규칙이 햇볕 알레르기를 앓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저택에는 기괴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피아노가 연주되고,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레이스의 딸 앤은 '끊임없이 울어대는 빅터라는 어린 남자애와 눈먼 노파'에 대해 얘기하고, 심지어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주장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레이스는 어린 딸의 '귀신 얘기'를 공상으로 치부하고, 벌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그레이스를 제외한 모두가 집 안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상한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됐던 남편 찰스가 갑자기 돌아온다. 찰스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하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심지어 아내와 정사까지 나누지만 "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되뇌이다가 돌아온 날처럼 조용히 사라진다.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happen(일어나다, 발생하다)'이라는 단어. 어린 딸 앤이 "It did happen"이라고 말하며 등장하는 이 단어는 그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서로간의 물음과 대답을 통해 종종 튀어 오르지만, 절정에 이를 때까지 그 실체를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저택을 음습한 싸늘한 분위기는 점차 더 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막판 10분의 반전으로 치닫게 된다. 줄거리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이다. 스릴러 감상의 묘미는 막판 반전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니 독자들의 감상권을 빼앗지 않도록 하겠다. 흥행수입 1억달러를 넘는 블록버스터는 1년에도 몇 편씩 쏟아져 나오지만, '괜찮은 스릴러'는 흔히 나오지 않는다. 막판 반전이 돋보였던 스릴러가 요근래 몇 편이나 되는가? 96년의 '유주얼 서스펙트'나 99년 '식스센스' 정도가 그 반열에 오를 뿐이다. 더구나 '유주얼 서스펙트' 개봉때는 상영관 앞 영화 포스터 속의 범인(케빈 스페이시)에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그려졌고, '식스센스'는 '브루스 윌리스는 유령'이라는 한마디 말이 영화 팬들을 분노케 했다. 단지 영화 개봉일이 빨리 잡혀서 영화 내용이 더 공개되기 전에 스릴러 팬들이 영화를 직접 즐기길 바랄 뿐이다. 대신 영화에 대한 칭찬은 조금 더 해도 될 듯싶다. (안 그래도 할리우드 영화에 비판적이라는 삐딱한 눈총을 받고 있으니...) 반전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모습을 비치는 캐릭터들은 불과 7명. 할리우드 영화로는 비교적 적은 2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 촬영이 어우러져 '완벽한 놀라움'을 향해 치닫는다. 스페인 출신의 알레잔드로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abar) 감독이 직접 작곡한 음악과 하비에르 아기레사로베(Javier Aguirresarobe)의 촬영이 결말까지의 지루함을 상쇄시킨다. 여전히 어둠은 심리적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주요 기제로 작용하지만, '햇볕 알레르기에 시달리는 아이들'이라는 설정은 환할 때조차 또 다른 공포감의 묘미를 느끼게 한다. 출연자들 중 유일하게 지명도를 가진 배우인 니콜 키드먼은 이미 많은 장르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공포 영화에서 유난히 빛을 발한다. 최근의 활약들을 보면, '누구의 전 부인'이라는 타이틀이 더 이상 그녀를 옭아매기는 힘들 것 같다. 탐 크루즈는 이혼하기 전 키드먼과의 마지막 합작품에 제작자로 크레딧이 들어가는데, 작품의 각본과 연출, 음악을 함께 맡은 아메나바르를 발굴한 그의 안목도 대단하다. 그는 역시 아메나바르가 97년에 연출한 스페인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의 리메이크작 '바닐라 스카이'(카메론 크로 감독, 아메나바르 각본)에 출연중이다. 불과 2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디 어더스'는 8월 둘째주 136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려 4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영화는 탑 10 영화 중 가장 적은 1678개의 스크린을 잡았다. 1, 2위 작품의 기세가 등등하지만 개봉관 수를 늘렸다면 3위(프린세스 다이어리, 1410만 달러)는 눌렀을 것으로 보인다. 개봉 첫 주 흥행 성적만으로 가치를 설명할 수 없는 영화들이 있게 마련이지만, 관객들의 입소문을 기대하는 미라맥스측은 내주 개봉관 수를 500개 더 늘릴 계획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1위는 4510만 달러의 청춘 코미디 '아메리칸 파이 2'. 99년의 1편이 개봉 첫 주 1870만 달러를 올린 것에 비하면 속편이 두 배가 훨씬 넘는 수입을 올린 셈이다. 지난 주 1위였던 '러시 아워2'는 53%나 관객이 빠졌지만 첫 주의 압도적인 흥행에 힘입어 3150만 달러로 2위를 지켰다. 1, 2위만을 놓고 보면, "속편 장사는 전편에 미치지 못한다"는 공식도 무색할 정도다. 다음은 이번 주 박스 오피스 순위. ( )는 지난 주 순위, +는 데뷔작. 1 (+) American Pie 2 ......... $45.1 million 2 (1) Rush Hour 2 ............ $31.5 million 3 (3) The Princess Diaries ... $14.1 million 4 (+) The Others ............. $13.6 million 5 (2) Planet of the Apes ..... $13.3 million 6 (4) Jurassic Park III ...... $ 7.3 million 7 (+) Osmosis Jones .......... $ 5.6 million 8 (5) America's Sweethearts .. $ 4.6 million 9 (7) Legally Blonde ......... $ 3.8 million 10(6) Original Sin ........... $ 3.1 mi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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