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건 없다. 오늘 누리는 모든 편의는 지난시대의 수고로움에 빚진 것이다. 감사할 줄 모르는 세대는 지난 이들의 수고를 당연하다 여기기 십상이지만, 그 모두가 없었던 시절을 경험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오로지 당연한 게 없음을 아는 현명한 이만이 지난 세대의 수고에 감사할 줄 안다.

올해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하늘 아래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토록 했다. 지난 시대 공헌한 이들을 기리고 그 수고로움을 확인하는 섹션을 마련해 관객 앞에 소개한 것이다. 그 하나가 중견 감독의 신작을 소개하는 '지석', 아시아 영화가 한 단계 성장하는 데 기여한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의 부산영화제를 있도록 한 일등공신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을 다룬 다큐의 특별상영이다.

김동호의 이야기를 만난 건 우연한 일이었다. 영화제 기간 중 상영을 놓친 작품을 보기 위해 찾은 미디어 라이브러리에서 본래 보려 했던 작품을 만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기대한 작품이 올라와 있지 않았던 때문에 대신 무엇을 볼까 찾던 중 이 영화가 눈에 들어왔다. <영화 청년, 동호>, 다큐멘터리란 점에서도, 지난 시대 사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영화였다. 그러나 이렇게 거듭 눈에 밟힌다면 봐야할 일이다. 그렇게 나는 이 영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영화 청년, 동호 스틸컷
영화 청년, 동호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고가 되기까지

<영화 청년, 동호>의 주인공 김동호는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를 있게 한 주역이다. 첫 회부터 무려 15년 간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 최고이자 최대의 영화축제로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김동호란 이름은 영화판을 오가는 이들에게 폭넓게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늘 저보다는 다른 이들을 앞세웠던 이유로 그의 삶과 인격을 제대로 조명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와 같은 이에게도 그는 마찬가지여서 이 영화 <영화 청년, 동호> 또한 얼마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올해 칸영화제 칸클래식 섹션에서 상영되기도 했던 <영화 청년, 동호>다. 김량의 영화는 김동호의 학창시절부터 공직생활, 나아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시키고 집행위원장 직을 내려놓은 뒤까지의 이야기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말 그대로 평전 격의 작품이라 보면 옳겠다.

그 시절 많은 이가 그러했듯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동호다. 부산 피난 시절엔 어머니와 함께 장에 나가 물건을 팔고 학비를 벌어 공부를 했다. 특유의 성실함으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까지 진학했으나 법조인이 되기 위한 사법시험을 치를 여유까진 없었다. 군대를 전역한 뒤 공무원이 된 그는 문화공보부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로부터 반평생에 이르는 동안 국가 문화산업 저변을 닦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이를테면 국립현대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을 기획하고 설립해 운영하도록 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영화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던 1988년, 김동호는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민주화 열기가 한창 들떴던 시절, 시민사회가 처음으로 국가권력을 이겨낸 87년 6월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때가 아닌가. 문화부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영화산업의 진흥을 이끌어야 하는 중차대한 역할, 웬 공무원이 낙하산으로 내려온다며 반대움직임이 인 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남부군> <하얀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199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는 정지영이 김동호 사장 낙하산 부임의 전면에 나섰다.

영화 청년, 동호 스틸컷
영화 청년, 동호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한때의 반대자도 감명케 한 삶

그러나 수십 년이 흘러 정지영은 김동호의 전기 다큐, <영화 청년, 동호> 카메라 앞에 얼굴을 들이민다. 김동호의 당시 모습을 술회하고, 그가 영화사에 남긴 족적을 설명한다. 김동호가 어떤 자세로 영화인을 만나 설득했는지, 어떻게 진심을 다하여 스스로 영화인이 되어갔는지를 이야기한다. 그중 하나는 상을 당한 청년 감독, 정지영을 찾아 조문한 것.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젊은 영화인을 찾아 조문할 만큼 마음을 썼다는 사실에 그는 적잖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한다.

진심이 담긴 행보로 논란을 돌파한 김동호다. 한국영화의 살 길이 해외에 있다며 적극 외국을 나다니고 한국영화를 알린 건 선견지명이라 해도 좋겠다. 해외영화제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던 한국영화가 마침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씨받이>에 출연한 강수연이 세계3대 영화제로 불리는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아시아 배우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가 이 때 있었다.

한국영화가 처음으로 배출한 세계적 성취가 아닌가. 강수연은 차기작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당시로선 제법 권위 있던 모스크바영화제에서도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냉전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 여전히 냉엄했던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국내외에 있던 시대였다. 구소련의 중심인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영화제이니만큼 참석 여부를 두고 영화사나 당국 또한 난감할 밖에 없던 일이다. 그때도 김동호 사장은 결단했다. 강수연은 모스크바에서 당당히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한국영화의 쾌거가 헛된 이데올로기적 갈등 아래 무산되지 않기까지, 김동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남양주종합촬영소 또한 김동호 사장이 이룩한 성과다. 1997년 설립된 이 시설은 한국영화가 자랑하는 영화촬영 세트로 명성이 높다. 수많은 영화인들과 대화한 결과 사극을 비롯한 영화촬영 세트가 필요하단 판단에 이른 그다. 김동호는 과거 예술의전당이나 현대미술관 등을 기획하고 건립한 노하우를 살려 경기도 남양주에 부지를 선정하고 촬영소 건립에 돌입한다. 한강 상수원에 대규모 시설을 건설한다는 비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끝끝내 완공된 촬영소는 이후 한국영화 전성시대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미술관 옆 동물원> <여고괴담> <쉬리> <동감> <엽기적인 그녀> <킬러들의 수다> <파이란> <광복절 특사> <취화선> <피도 눈물도 없이> <공공의 적> <클래식> <실미도> <동갑내기 과외하기> <왕의 남자> 등 굵직한 한국영화 거의 모두가 이곳을 거쳤다.

영화 청년, 동호 스틸컷
영화 청년, 동호스틸컷부산국제영화제

반평생 공직인생이 끝난 뒤 영화인이 됐다

김동호는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거쳐 예술의전당 초대 사장, 문화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연달아 역임한다. 특히 마지막 공연윤리위원회는 영화 심의 등을 주관하는 기관으로, 진흥보다는 통제와 규제의 역할을 수행한단 점에서 그 기능을 달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김동호는 이곳에서도 저만의 색깔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남성의 성기가 그대로 노출되는 작품 <크라잉게임>을 편집 없이 상영토록 하는 등 이전 한국영화 상영 기준으로선 파격적인 결정을 거듭한 것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그의 결정들이 이어지며 언론의 맹폭과 사회적 비판이 일었고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30여년의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공직생활 30여년, 차관급 공직자로 50대 후반의 나이가 된 김동호다. 이제는 은퇴해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에게 찾아온 또 다른 기회, 그리고 그를 통해 김동호가 이룩한 업적을 인상적으로 비춘다. 어쩌면 이제까지 그려진 모든 것이 그저 이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서막인 것도 같다.

뒤는 무엇인가.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있기까지 공헌한 전직 고위공직자의 노력이다. 백수가 된 그에게 부산의 청년들이 함께 영화제를 만들자고 찾아온다. 박광수, 김지석, 이용관 등이었다. 한국영화에 일천한 해외 국제영화제 참가 경험을 가진 데다 행정경력 까지 갖춘 김동호는 결정적 도움이 되었다. 가능하다 믿는 이 얼마 되지 않았던 부산국제영화제를 마침내 성사시켰다.

그는 당시의 어려움을 떠올린다. 우선은 재정적 문제다.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5억원 정도 지원을 해주겠다 약속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1억 원 남짓에 그쳤다고 했다. 그는 직접 부산시 정무부시장을 찾아 면담하고 시장과도 자리를 갖는다. 당시 정무부시장은 십수억원대 예산을 적극 지원해주겠다 확답했지만 결과적으로는 3억 원 지원이 고작이었다. 영화제 총 예산 22억 원 가운데 김동호가 모은 것이 10억 가량이 됐다. 그걸 가지고 첫 영화제를 연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부산국제영화제포스터부산국제영화제

무엇이 성공한 삶인가를 묻는다면

영화는 온갖 역경 가운데 첫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매년 세계 유수의 영화인이 찾는 아시아 대표 영화제로 자리 잡는 과정을 그린다. 유료관객만 18만 명, 첫 행사의 성공적 개최부터 십수 년 간 영화제의 얼굴로 전 세계를 뛰어다는 김동호의 수고로움을 포착해낸다.

영화제가 자타공인 아시아 제일로 안착했을 때 비로소 물러나 또 다른 작업에 매진하는 그의 현재까지를 보여준다. 직접 단편영화 <주리>를 감독하고, 클레어 드니와 장률, 임권택 등의 영화에서 연기까지 한다. 한국 문화 전반의 틀을 잡는 공무원에서 부산국제영화제를 일군 행정가, 다시 영화를 창작하고 연기하는 영화인까지 거듭 변신하는 그의 모습이 놀랍다.

<영화 청년, 동호>는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짚게 한다. 그가 그저 차관급 공무원이나 노후걱정 없는 은퇴한 노인으로 삶을 마치지 않았단 사실이 그의 오늘을 있도록 했다. 무사안일한 공무원으로 사는 대신 뜻을 세우고, 역경 앞에서도 뜻을 지켜내려 분투한 선택이 오늘의 김동호를 이뤘다. 그는 운이 좋아 문화예술과 한국영화가 격변하던 시기, 간절한 손길이 그에게 내밀어졌다. 그는 그를 붙잡고서 흔들림 없이 전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한 한국 영화와 문화예술의 저변이니, 나는 김동호가 마땅히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여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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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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