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계 말레이시아 배우 양자경은 1980~90년대 <예스마담> 시리즈를 통해 홍콩을 대표하는 여성 액션배우로 맹활약했다. 양자경은 이 같은 커리어를 앞세워 1997년 <007 네버다이>에서 본드걸로 출연해 뛰어난 액션연기를 선보였고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할리우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2022년에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통해 환갑의 나이에 아시아 여성배우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양자경처럼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활동하다가 뒤늦게 커리어의 정점을 맞는 배우도 있지만 많은 여성배우들은 젊고 아름다운 시절에 짧고 굵게 활동하다가 이른 시기에 커리어를 마감하기도 한다. 실제로 1980~90년대 홍콩영화의 중흥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종초홍, 관지림, 조민, 구숙정, 이가흔 등 적지 않은 여성배우들이 1990년대 중·후반 홍콩영화의 침체기를 전후로 아쉽게 배우 활동을 접었다.

그렇게 조기에 활동을 접은 배우들 중에는 홍콩 현지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왕조현도 있었다. 왕조현 역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94년 은퇴를 선언하면서 커리어를 일찍 마감했다. 하지만 왕조현은 그 시절 홍콩영화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대표작을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왕조현이라는 배우를 상징하는 영화가 된 정소동 감독의 <천녀유혼>이다.
 
 <천녀유혼>은 지난 2019년 고 장국영의 사망 16주기에 국내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천녀유혼>은 지난 2019년 고 장국영의 사망 16주기에 국내에서 재개봉되기도 했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감동적인 스토리의 아시아 판타지 멜로

사실 초현실적인 스토리의 판타지 영화는 장르의 특성상 많은 CG와 특수효과가 동반돼야 하기 때문에 앞선 기술력을 보유했고 많은 제작비를 투자할 수 있는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판타지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들어간 '멜로'라는 장르가 섞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양권에서도 초현실적인 설정과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어우러진 판타지 멜로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져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최민식과 함께 출연한 <파이란>의 여주인공으로 유명한 장백지는 1999년 데뷔작이나 다름 없었던 판타지 멜로 <성원>에서 간호사 초란 역을 맡았다. <성원>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맹인 주인공이 천사로부터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을 알리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일시 환생한다는 내용의 판타지 멜로영화다. <성원>은 장백지라는 신인배우를 아시아 관객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

2003년에 발간된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일본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05년 드라마로 제작됐고 2018년에는 한국에서 손예진과 소지섭 주연으로 리메이크됐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판타지 멜로다.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오고 타임슬립이 등장하는 등 일본 멜로영화 특유의 감성에 판타지 요소를 섞은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일본 멜로영화의 걸작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작품 중 하나다.

주걸륜이 감독과 각본, 주연, 음악까지 '1인 4역'을 소화한 대만의 판타지 멜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대만영화의 부흥을 알린 작품으로 꼽힌다. 국내에서도 개봉 당시 전국 15만 관객을 동원했고 꾸준히 입소문을 타면서 2015년에 재개봉하기도 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두 주인공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도 심금을 울렸고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피아노 배틀' 역시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국영화 중에도 <은행나무 침대>를 비롯해 <시월애>,<늑대인간>,<뷰티 인사이드> 등 많은 판타지 멜로영화들이 있지만 2001년에 개봉한 <번지점프를 하다>만큼 긴 여운을 남긴 작품도 드물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여인이 남자로 환생해 학교 선생이 된 남자주인공의 제자로 들어온다는 설정의 <번지점프를 하다>는 최근엔 보기 힘든 이병헌의 애절한 멜로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고 장국영-왕조현의 슬픈 러브스토리
 
 고 장국영(왼쪽)과 왕조현은 <천녀유혼>을 통해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고 장국영(왼쪽)과 왕조현은 <천녀유혼>을 통해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천녀유혼>을 연출한 정소동 감독은 <매트릭스>와 <와호장룡>,<킬빌>,<엽문> 시리즈 등의 무술감독을 맡았던 원화평 감독과 함께 홍콩영화 무술감독의 양대산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정소동 감독 역시 원화평 감독과 마찬가지로 무술감독과 영화연출을 병행했는데 감독으로서 그의 대표작이 바로 서극 감독이 제작에 참여했던 <천녀유혼>이다(정소동 감독은 <천녀유혼> 트릴로지를 모두 연출했다).

<천녀유혼>은 17세기 말 중국 청나라의 고전문학 <요재지이>에 나오는 '섭소천'편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동양 괴기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87년 영화라고 믿어지지 않는 신비로운 영상과 한창 떠오르던 두 주인공의 빼어난 미모 및 호연, 그리고 좋은 음악이 어우러지면서 1980년대 중·후반 홍콩을 대표하는 판타지 멜로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무술감독 출신 정소동 감독이 맡은 액션 역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다. 

<천녀유혼>은 가난한 서생 영채신(고 장국영 분)과 빼어난 미모로 남자들을 유인해 희생시키던 처녀귀신 섭소천(왕조현 분)의 사랑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천녀유혼>은 국내 개봉 당시 서울관객 3만에 그쳤지만 이후 국내에서 왕조현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비디오 시장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고 장국영에게 1987년은 매우 의미 있는 해였다. '전설의 공중전화신'을 남겼던 누아르 <영웅본색2>와 애틋한 멜로연기를 보여준 <천녀유혼>이 동시에 개봉했기 때문이다. 장국영은 <천녀유혼>에서 떠오르는 신예배우 왕조현과 애틋한 사랑연기를 주고 받으며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고 영화의 주제가를 직접 부르기도 했다. 이 밖에 <첩혈쌍웅>의 제니 역으로 유명한 엽천문이 부른 <여명불요래> 역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국영은 <천녀유혼2>까지 출연한 다음 시리즈에서 하차했고 3편에서는 양조위가 새로운 남자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천녀유혼>이 인기를 끌자 비슷한 장르의 <금연자>,<화중선> 같은 아류작들이 개봉하기도 했다(심지어 왕조현은 <천녀유혼>의 아류작으로 불린 <화중선>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2011년 '리틀 왕조현' 유역비가 섭소천 역을 맡은 <천녀유혼> 리메이크작은 왕조현의 존재감만 확인시켜 준 아쉬운 영화가 됐다.

은둔고수 연기했던 홍콩의 만능 영화인
 
 영화 초반 악역처럼 등장한 연적하는 중반부터 주인공 영채신의 조력자가 된다.

영화 초반 악역처럼 등장한 연적하는 중반부터 주인공 영채신의 조력자가 된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천녀유혼>에는 두 주인공 외에도 섭소천이 거주하는 난약사에 은거하는 의문의 도인 연적하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사실상 무력은 거의 없는 주인공 영채신과 달리 연적하는 포도대장 시절 '강호제일검'으로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무력을 자랑한다. 험악한 인상에 말투 역시 불친절하지만 영채신으로부터 섭소천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그녀를 도와주기로 결심할 정도로 착한 마음씨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연적하를 연기한 고 우마는 1960년대에 데뷔해 1980~90년대 홍콩영화의 부흥기 때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활동했던 배우다. 1970년대에는 <대해도>,<칠성권왕>,<채리불소자>,<해군돌격대> 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미스터 부:지용삼보>에서는 감독과 함께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다양한 재능을 뽐냈고 배우 겸 감독, 기획자, 무술감독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31년생의 원로배우 유조명은 <천녀유혼>에서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천년 묵은 나무요괴로 출연했다. 살인을 서슴지 않으면서도 "나는 나쁜 사람만 죽이니 오히려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궤변을 늘어 놓는다. 나무요괴는 연적하의 보검에 맞아 100년간 요력이 봉인 당했다가 100년 뒤를 다룬 3편에서 부활한다. 1,3편에서 나무요괴를 연기했던 유조명은 2편에서는 왕조현의 아버지 역으로 출연해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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