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유천> 스틸컷
(주)영화제작전원사
03.
홍상수 감독의 많은 작품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에서도 인물들의 사건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화의 처음에서 왜 하천 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등장하는지, 그 장면은 왜 반복해서 등장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중반부 이후 몇 차례 등장하는 밤하늘의 달을 포착하는 장면이나 전임이 술자리를 떠나 학교로 돌아가는 장면에 등장하는 커다란 낙엽과의 호흡이 담긴 신을 주목해 봐야 한다. 이 장면들은 모두 정(正)의 방향이나 위치에 속한다. 원래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거나 순행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재의 모양을 갖게 된 것. 인간의 표현으로 대신하자면, 그 공간이나 시간에 놓여 있을 때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으며 역(逆)의 위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대상이다.
그 역(逆)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상황을 통해 제시된다. 과거 특정 무리에 의해 예술계에서 매장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시언의 과거 상황이 그렇고, 자신이 맡은 연극에 물의를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나타나서 사람을 좋아한 게 잘못은 아니지 않냐며 목소리를 높이는 연출 준원의 태도가 또 그렇다. 학교의 촌극을 좋지 못한 일로 퇴출당한 시언에게 맡겼다는 이유로 정 교수와 전임을 호출하는 총장의 모습도 정당하다고는 볼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전임과 시언 두 사람 사이의 사연도 마찬가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강의 모습과는 다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을 통해 홍상수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正)과 역(逆)의 이분법적 구분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영화의 처음에서 일방적인 피해자처럼 그려지던 시언 역시 과거 자신이 실수했던 바가 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고, 연출 준원에 의해 거짓된 사랑의 피해자가 된 세 학생 중 하나인 지수는 다시 찾아온 그의 고백 앞에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을 줄 모른다. 작품 속 모든 이야기의 핵심은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정반합'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과거를 딛고 성장해 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처럼 다가온다.
04.
나머지 네 학생과 시언이 함께 준비한 촌극이 무대에서 선보여진 뒤 이어진 뒤풀이 장소의 장면은 같은 맥락에서 찍힌 온점과도 같다. 시를 지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시언의 제안에 네 학생은 한 명씩 자신이 꿈꾸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네 학생이 말하는 이상은 깨끗하고 순수하다. 영화의 표현을 빌려 이들을 '강'이나 '하천'으로 비유하자면, 아직 세상을 향해 제대로 흘러가기 이전의 수원(水源)과도 같다. 우리의 삶이란 것이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도, 반대의 방향으로 역행하는 일도,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도는 모습까지도 모두 하나의 흐름처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전의 모습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서 전임이라는 인물 주변의 인물, 시언과 정 교수, 연출 준원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들은 정확히 인물의 관점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부분을 다시 한번 들여다 필요가 있다. 처음에 잠시 언급했던 감독의 전작 <당신얼굴 앞에서>에서도 많은 인물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모양으로 지나간 바 있다. 이 작품에서는 그보다는 조금 나은 (뒤풀이 장면으로 인해) 상황이지만, 여전히 개별적으로 인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시언에 의해 촌극이 완성되기 이전의 장면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두 작품을 의미적으로 동일시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특정한 존재의 어떤 면을 깨우고 완성한다는 점에서 어딘가 조금은 간지러운 듯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