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영화 <룩백> 스틸컷
메가박스중앙(주)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1.
감정은 하나의 시점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공간에서 발현하여 지금 이 시간 속에서 유영하듯 떠다니는 감정은 단순히 그렇게 머물다 휘발하지 않고 추억이나 기억 속에서 또 한 번 존재한다. 어떤 의지로 저장되거나 간직되는 것은 아니다. 외딴섬의 로빈슨 크루소가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듯이, 우리 또한 한참 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그렇게 마주하게 된다. 정확한 것 하나는 더 이상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더 많은 세상을 경험했고, 달라져버린 주변 상황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훨씬 다양한 변주와 다양한 순도를 가진 또 다른 감정을 체험했다. 이것을 성장이라는 단어로 대강 뭉쳐 싸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게 뭉뚱그리고 나면 더 이상 함께 나아갈 수 없는 지난 기억과 여전히 그대로인 그때의 감정이 영원히 모습을 감춰버릴 것만 같아서다. 영화 <룩백>의 첫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그렇다.
이 작품은 일본의 유명 만화가인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현재 소년 점프+에서 <체인소 맨>을 연재하고 있는 작가는 지난 2021년 만화가를 꿈꾸는 주인공 후지노와 친구 쿄모토의 이야기로 <룩백>을 공개했고, 당일에만 300만 회가 넘는 뷰(veiw, 인터넷상에서 사용자가 홈페이지를 열어본 횟수)를 기록하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애니메이션화는 '스튜디오 두리안'을 설립하며 다양한 작품에 참여하고 있는 오시야마 키요타카 감독이 맡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요청으로 함께 작업했던 이력이 있을 정도로 업계에서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원작자인 후지모토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방식이 자신과 비슷하여 이야기에 깊이 감정이입하며 솔직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며 이번 작업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02.
영화화된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만화 <룩백>이 그렇듯, 이 작품 역시 두 소녀가 만화를 통해 교류하며 나아가는 시간을 그려내고 있다. 그림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한 후지노와 세상과 단절된 채로 방 안에만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전부였던 쿄모토가 중심이 된다. 두 작품 사이에 이야기의 흐름이 변한다거나 새로운 각색이 더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차이가 있다면 정적인 이미지가 동적인 이미지로 환원되면서 조금 더 직관적이고 적확한 표현이 가능해졌다는 부분이다.
만화와 애니메이션 양쪽 모두가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후지노와 쿄모토 두 사람의 관계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굳이 나누자면 세 차례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내내, 관계성으로부터 시작되는 두 인물의 감정이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보다 전면에 내세워지는 것은 후지노의 감정이다. 어떤 시점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녀의 내면은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쿄모토는 그런 변화를 촉발하는 요인이자 그 변화를 봉합하는 대상으로 활용된다. 극의 불안과 균열을 이끌어내는 쪽이 후지노, 화해와 안정을 완성하는 쪽은 쿄모토가 되는 것이다.
불안과 균열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해서 후지노라는 인물이 악인으로 그려진다거나, 화해와 안정에 놓인 쿄모토가 선을 구현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시각은 위험하다. 작품 속 두 소녀는 선악의 문제가 아닌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노력, 재능의 발현을 인식하고 있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 자의식의 강약 등의 여러 지점에서 서로 반대쪽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이 이야기에 '성장'이라는 단어 하나를 놓음으로써 단순화시키고 싶다고 하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단지 두 인물의 동력에 해당하는 감정과 획득되는 장면의 결과적 환기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단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