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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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한국 독립영화와는 사뭇 다른 미국 독립영화의 진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웅적인 주인공 혹은 굵직한 사건 중심으로 굴러가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문법과도 다르다.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 그리고 주류영화에서 배경으로만 그려지는 일상 속에 깃든 다양한 예상 밖 단면을 조명한다. 삶과 지역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함께 획일적이지 않은 열린 사고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미국 독립영화 발굴과 등용의 메카로 꼽히는 '선댄스 영화제'가 상징하는 영화적 경향이라 해도 좋겠다.
물론 그런 경향이 그저 평범한 일상을 현미경처럼 고찰하는 데 그치진 않는다. 상업영화가 편의점 장면을 묘사할 경우 그저 주인공의 행위에서 도구적 배경으로 물건을 산다, 혹은 사건의 현장이 된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식으로 처리될 것이다.
독립영화의 시선으로는 계산대의 점원이 점원끼리 또는 손님과 나누는 대화 속에 숨은 기류나 뼈대 있는 농담이 두드러질 테다. 지나가는 말 속에서 영화 속 시공간 특징이 압축되고 전개를 풍성하게 해줄 상황 배경이 암시된다. 그런 함축적인 표현과 밀도의 유지 같은 기본기를 눈여겨본 메이저 스튜디오가 인재를 발굴해 할리우드 상업영화에 새로운 피를 수혈해온 셈이다.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역시 선댄스 영화제의 총아로 주목받은 작품이자, 그런 미국 독립영화의 개성을 표상하는 작품이다. 데이지 리들리가 본 작품에서 주연과 제작을 겸하며 프랜 역을 맡았다.
우리에겐 <스타워즈> 시퀄의 진 주인공 '레이' 역으로 알려진 그는, 이후 블록버스터보다는 연기력이 요구되는 중소규모 영화에 주로 활약하며 제작자 경력도 쌓아갔다. 광선 검을 휘두르며 출생의 비밀을 안은 전형적인 영웅으로 배우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깜짝 놀랄 연기 변신이다(물론 이는 <스타워즈> 이후 10년 넘게 다양한 배역으로 활약한 배우에 대한 직무유기의 고백이기도 하다).
프랜의 과거사는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가족이 있지만, 영화 내내 그가 지인과 연락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보통 그런 주인공의 과거사를 어떻게든 배치해 궁금증을 풀어줄 테지만, 이 영화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프랜 같은 인물은 사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고 어쩌면 관객 자신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영화 속 주인공은 마치 자신들의 자화상처럼 받아들여질 테다. 타인과 관계에 애를 먹는 나머지 보호색이 발동해 외부에 철벽을 쳐놓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는 존재. 외로운 그들은 어떤 돌파구를 꿈꾼다. 프랜에게 그 수단은 실제 결행하진 않지만 늘 상상하는 자신의 최후다.
하지만 기존 입장을 바꾸게 할지 모를 상대를 만났다. 영화 취향도 다르고 안 맞는 점이 제법 있지만, 자신의 숨겨진 장점을 발굴해 주는 데다, 소유하거나 독점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로버트가 마음에 꽤 든다.
관계를 진전하려면 벽을 허물어야 한다. 최종 단계에서 프랜은 겁을 먹고 최후 방어본능이 작동한다. 이는 상대를 배척하는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프랜은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받는다. 최악의 주말이 지난다. 같은 직장에 다니기에 월요일 아침이 되면 둘은 재회를 피할 수 없다. 프랜에게 결단이 남았을 뿐이다.
곱씹을수록 풍부한 맛 보장되는 성장드라마의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