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장면 갈무리
SBS
사실 전두환은 이미 퇴임 직후부터 여러 번 심판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전두환의 뒤를 이어 쿠데타 동지이자 절친이던 노태우가 13대 대통령으로 집권에 성공하며 군사정권이 이어졌지만, 동시에 국회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정국이 된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주도한 야권은 전두환 정권의 비리와 5·18 광주항쟁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어쨌든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시대처럼 무조건 권위로 찍어 누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야당과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1988년 12월,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5공화국 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전두환을 향한 첫 번째 심판의 칼날이었다. 당시 청문회는 전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TV를 통하게 생중계되며 무려 81%에 이르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장세동 안기부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5공정권의 실세, 유명 정치, 관료, 기업인 등이 줄줄이 청문회에 소환됐다. 그리고 12월 31일에는 전 대통령이 된 전두환도 결국 청문회에 증인으로 소환된다.
하지만 전두환은 질의응답 없이 미리 준비한 발표문만 낭독하고 자리를 피했다. 전두환은 5·18에 대해서는 사과 없이 '정당한 자위권 행사였다'고만 주장하며 야당 의원들의 거센 반발을 자아냈다.
청문회 결과, 전두환의 측근과 일가친척들은 비리 혐의로 구속되었으나 전두환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전두환은 이미 그해 11월 23일 이미 대국민 사과를 하며 고개를 숙였고 비자금 환원을 사회에 약속했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대신 전두환은 노태우 정권과의 암묵적인 합의로 사찰인 백담사로 피신해 한동안 유배상활을 하는 것으로 처벌을 모면했다. 그렇게 전두환을 향한 첫 번째 심판 시도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는 '문민정부'가 출범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비록 3당합당으로 군사정권과 타협했다는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32년 만에 군사정권을 종식시킨 최초의 민간인 대통령이다. 특히 김 대통령은 야당 시절 군부독재에 유난히 강하게 저항한 인물로, 전두환과는 서로 치를 떨 만큼 싫어하던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에는 군내 사조직'하나회 숙청',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역사적 정리' 등을 추진하며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개혁 조치를 단행하여 국민들의 높은 지지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작 전두환 등 군사정권의 가해자들에 대한 단죄에는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 과정에서 5공 관련자에 대한 처벌 감형을 두고 정치적 거래를 해야 했던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여기에 정권 차원에서 심판을 주도한다면 자칫 민주주의 체제에서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한다는 절차적 부담도 안아야 했다. 이에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만 해도 속내와 별개로 전두환-노태우를 전직 대통령으로 예우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했고, 청와대에 초청하며 만찬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당시에 나온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유명한 논리는 유행어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4년경에 접어들며 상황이 반전된다. 12·12 쿠데타의 피해자였던 장태완과 정승화 전 장군,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족들이 연이어 전두환과 노태우를 고소하며 법의 심판을 요구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당시 검찰은 이를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하며 기소 자체를 거부했다. 초기에 단죄에 미온적이던 김영삼 대통령도 이 소식을 듣고는 검찰에 크게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로 김영삼 정부가 갑자기 태세를 180도 전환하며 전 정권 심판에 앞장서게 된 데는 또 다른 정치적 속사정이 있었다. 초기에 높은 지지율을 달리던 문민정부는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등 초대형 사건·사고가 이어지며 지지율이 급락했고 민심이 크게 이반되고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국면 전환과 지지율 회복을 위하여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을 선언하며 과거사 청산을 위한 칼을 뽑아 들게 된다.
문제는 검찰이 이미 군사정권 세력에 불기소 처분을 내린 상황이었다는 것. 대통령이자 여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국회를 이용하여 1995년'5·18 특별법'이라는 새로운 법을 제정하는 방식으로 군사정권을 단죄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특별법이 통과되고 두 달 만에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된 최환 검사장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기존의 검찰 기조를 거부하며 전 정권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주도했다. 그는 영화 < 1987 >에서 배우 하정우가 연기한 검사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최환 검사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으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고 사건을 덮으라는 외압을 받았음에도, 서슬퍼런 권력의 지시를 거부하고 끝까지 사건의 진실을 밝혀냈을 만큼 강단 있는 검사였다.
노태우의 비자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