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증발된 사람들> 스틸컷
EBS국제다큐영화제
02.
이 작품에는 몇 명의 '증발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모두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배치된다. 영화의 처음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사라지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실종자들을 보면 사실 떠나고 싶진 않았지만 사라져야만 했던 사람, 정말 실종되고 싶어서 모습을 감춘 사람 등 각자의 사정에 따라 그 경우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본 사회에서는 가정이나 학교, 직장에서 문제가 생기면 수치스럽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두 감독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스기모토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 내려온 회사를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고향에서는 제법 유명한 회사였다. 그런데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여기저기 빚을 지게 되었다. 5억 엔(한화 약 45억 원)이 넘어갈 때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텅 빈 느낌마저 들었다. 가족과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기다려달라는 편지만 남기고 혼자 떨어져 나온 이유다. 가문의 수치라는 생각에 생명보험을 떠올리고 나쁜 생각을 했지만 실행한 용기는 없어 택한 차선이었다. 평소처럼 양복을 입고 출장을 가는 것처럼 집을 떠나온 그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 방황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남자는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야쿠자 사무실에서 전화 업무로 일을 시작했다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무작정 배에 올랐다. 집으로 수금하러 찾아오겠다는 야쿠자의 연락에 필사적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는 증발된 사람이 되었다. 이쪽 세계에서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원래의 세상에서는 잊힌 존재인 셈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는 증발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없다. 그저 먹고 잘 수 있는 곳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며 매일 살아갈 뿐이다.
나이트 무버의 도움으로 숙식이 해결가능한 러브호텔에서 일하며 숨죽이며 살고 있는 두 남녀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좋은 선배라고 믿고 있었던 선배의 권유로 입사한 회사에서 갈취와 협박을 당하고 사생활도 거의 없는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하다 몰래 도망쳐 왔다. 소위 말하는 블랙 기업이었다. 여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는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던 삶에서 유일하게 믿고 있던 사장으로부터 야쿠자에게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도망치면 다행, 붙잡히면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현재에 다다르게 된 셈이다.
03.
"이제야 지하 깊은 곳에서 나와 조금은 볕이 드는 동굴까지 올라온 기분이에요. 아직은 좀 어둡지만요."
자신이 원래 머물고 있었던 세상을 떠나온 이들의 처음 이야기는 그들의 선택에 대한 수긍을 이끌어낸다. 물론 그들이 선택한 현재의 모습이 좋은 상황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야쿠자에 쫓겨 배에 올랐던 남자는 오사카의 슬럼가로 알려진 '니시나리'의 한 평 남짓된 쪽방에서 남은 생을 이어가고 있고, 회사의 경영난으로 빚더미에 오른 스기모토씨는 친형의 추적으로 인해 아내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러브모텔에서 일하고 있는 두 사람 역시 제대로 된 삶을 누리지는 못한 채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볕이 드는 동굴까지 올라온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대로 과거의 현실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유추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첫 장면에 등장했던 사이타씨의 야반도주 서비스 TSC는 '증발되고 싶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으로 인식된다. 처음 시작은 1990년대 버블경제 붕괴로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앉았을 때였다고 한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당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조하쓰'가 되고자 했고, 이때 나이트 무버들의 도움을 받았다.
대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운용되었지만 법망을 피하는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최우선 목표는 고객의 요청대로 현재의 위치에서 신분과 행적을 지우는 일이다. 아무도 모르게 최소한의 짐만 꾸려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의뢰인을 데려다준다. 최소한의 자립이 가능하도록 새집과 직장을 알아주고 필요한 경우 경찰서에 동행하거나 법조인을 만나는 일도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