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공주> 스틸컷
무비꼴라쥬
그럼에도 이 유튜버의 행위에 찬동하는 의견이 많았단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이 사회적 약자까지도 공정하게 지켜준다는 믿음이 산산이 박살나버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다. 범죄에 대한 공적제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짙은 불신이 어느 유튜버의 신상공개를 응원하는 대중심리를 빚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은 그 자체로 한국 법체계가 공적 제재를 하는 데 실패한 사건이 아닌가. 여론재판을 비판하는 이들조차 한없이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건 어느 언론 하나도 이 사건을 비롯해 법제도가 기능하지 못한 실패들에 대해 치열하게 취재하고 개선했다 말할 수 없어서 아닐까.
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는 최근 다시 뜨거운 감자가 된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시사점이 큰 작품이다. 영화가 실제 이 사건을 모티프로 삼았고, 그저 착상을 얻는 수준을 넘어 상당 부분을 재현에 가깝게 구성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는 절차가 없었다는 사실이 최근 드러나기도 했다. 지난 2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며 당시 피해자를 인터뷰했다. 피해자는 이 과정에서 제작진에게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저한테 동의를 얻었던 건 아니잖아요"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언론과 달리 대중을 대상으로 수익을 거두는 창작물인 영화가 동의 없이 작품을 제작해 상영한 것이 공론화를 넘어 2차가해가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설득력이 아예 없는 문제의식이라곤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로부터 한국 콘텐츠 제작의 그릇된 관행, 즉 당사자의 동의 없이 작품을 만드는 일의 타당성 또한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비단 민감한 형사사건인 <한공주>뿐 아니라, 유행가 제목을 딴 tvN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또한 곡 제작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 드라마를 제작해 상영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인 바 있다. 현행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련자 동의를 구하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 관행이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특히 사건의 피해자가 명확하고 여전히 어린 나이였을 그들이 받을 수 있는 고통이 분명하단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 어느 한 켠엔
그럼에도 작품엔 선명한 가치가 있다. 한국사회가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사건, 공적 제재를 하지 못했고 그럴 의지도 없었던 이 참극의 부조리함을 낱낱이 지적해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사건에 분개하고 문제를 지적하여 이제라도 바로잡을 구석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공주>는 주인공 한공주(천우희 분)가 다른 도시로 전학을 온 시점부터 시작한다. 고향을 떠나 전학을 온 공주는 낯선 도시에서 혈혈단신 혼자다. 그녀를 데리고 온 전 학교 교사(조대희 분)는 그곳에 사는 제 어머니에게 공주를 떠맡기듯 맡기고 돌아간다. 제 이름으로 개통한 전화기 하나를 내주고는 저와 공주의 아버지 말고는 누구의 전화도 받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로부터 공주의 삶이 펼쳐진다. 그 또래 아이들처럼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는다. 수영에 관심이 있어 동네 수영장에 등록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3년 동안이나 왕래가 없었던 어머니를 찾아가보지만 박대만 당하고 돌아오고, 기댈 곳 없는 외로움 가운데 제가 묵는 집 주인인 교사의 어머니와 조금씩 감정을 교류하기도 한다. 학교에선 먼저 다가온 급우 은희(정인선 분)와 그 친구들과도 관계가 생기지만 선뜻 친해지진 못한다. 공주가 유난히 예민한 탓이다.
영화는 공주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녀가 겪었고 또 겪고 있는 일들을 하나씩 드러낸다. 그녀가 왜 예민한지를, 어째서 저를 촬영하고 녹음하는 일에 민감한지를 알도록 한다. 그것이 그저 과민한 기질 탓이 아니라 현재적 위협이고 과거 있었던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됨을 일깨운다. 그 모두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살아 숨 쉬는 이 땅, 이 나라, 이 사회가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비춘다. 그 처참한 가해 앞에서 우리가 웃고 떠들며 평화롭다 여기는 이 세상이 무력하고 무관심했단 것을 자연스레 드러낸다.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력 사건의 영화적 재현